유라시아의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29)
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하얀 도시’, 베오그라드의 의미이다. 하얀 도시의 첫인상은 검고, 어둡고, 칙칙했다. 다뉴브 강에서 올라온 우윳빛 안개에 휩싸인 베오그라드는 때마침 동떠오는 태양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베일을 쓴 신부의 모습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워서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넘어 노도(怒濤)와 같이 진격하던 오스만 제국의 군대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에 이르러 넋을 잃어버렸다. 새벽녘 기습공격을 감행할 무렵 마력의 아름다움에 군인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멈칫했다.
지나가는 나라마다 도나우 강을 만나니 이젠 도나우 강이 오래된 친구인양 반갑기도 하고 정감이 간다. 내가 다시 도나우 강변을 달릴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가족과 연인끼리 강 물결이 가을 햇살을 받아 잠자리 날개처럼 은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시각 강 언덕을 걷고 있었다. 중부 유럽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던 낭만의 아름다운 도나우 강의 흐름은 여기서도 생기발랄하건만 이곳의 역사의 흐름은 어둠침침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곳에는 아직도 크고 작은 민족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는데 배후에는 언제나 국가 이기주의의 늪에 빠진 강대국들이 있다.
나는 이곳까지 오면서 세르비아 사람들의 정감 넘치는 유혹에 넘어가 정분이 난 상태라 검고 칙칙한 가운데서도 그들의 희망을 보았다. 그들이 얼마나 평화를 흠모(欽慕)하는지 보았다.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면 나도 상대방이 좋아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상대방이 하나를 주면 열을 주고픈 건 내 마음이다. 식당에 가면 하얀 담배연기 속에 식사를 해야 하는 걸 각오해야 하는 것만이 ‘하얀 도시’의 이미지와 맞다면 맞지만 말이다.
오늘도 들판을 달리는데 이제 겨우 젖을 뗐을 정도의 강아지 두 마리가 나타나 나를 또 쫓아오고 있었다. 이번엔 정이 들기 전에 단번에 쫓아버렸는데 영 마음이 편치 않다. 들판의 개들은 유난히 크다. 거기에도 약육강식이 존재하여 강하고 큰 놈들만 살아남고 힘없는 놈들은 도태(淘汰)된다고 한다. 어느 외교관 부인이 야생 개한테 물리는 사건이 일어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돼 들개의 70% 정도를 없앴다고 한다.
도나우 강과 사바 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이며 북쪽으로는 보이보디나 평원과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슈마디아 언덕과 접하고 있다. 이 ‘하얀 도시’는 자존심이 강한 발칸의 고도이며 수륙교통의 요지일 뿐 아니라 전략적 요지로 옛 유고연방의 수도이기도 했었다. 이미 기원전 4세기부터 켈트족이 요새와 도시를 건설했고, 기원전 1세기에 이곳을 점령한 로마 제국은 수상요새를 세웠다.
베오그라드는 지난 200년 동안 40번이나 파괴되고 다시 건설된 비운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마 세계에서 이보다 더 고난을 당한 도시는 없을 것이다. 시내 곳곳에 아직도 파괴된 건물들이 참혹한 전쟁의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사관 직원들과 점심 식사를 하러 가면서 본 폭격당한 옛 중국 대사관 자리가 웅변으로 증명하여주고 있다. 당시 뉴스에는 미군이 주축이 된 나토군의 오폭이라고 나오지만 당시 중국 대사관에는 코소보 전쟁 당시 참전한 미 공군 F117A 스텔스 전폭기 잔해를 입수해 보관하고 있었고, 중국의 스텔스기인 젠 14는 그 잔해를 입수해 연구한 결과라는 홍콩 일간지의 보도도 나중에 있었다.
세르비아의 가장 큰 실수는 보스니아가 유고 연방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침공에서였다. 시민들은 78일 동안 나토군의 크루즈미사일 정밀폭격으로 그 악몽 같은 나날들을 방공호에서 지내야했다. 대부분의 사회기반 시설은 파괴되었고 3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나토의 지상군이 투입되자 세르비아는 항복하고 코소보까지 내주어야했다. 이제 베오그라드 시내는 한창 공사 중이라 길마다 차가 막히고 보행자들은 여러 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전쟁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그건 아무 것도 아니어서 아무도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나는 대사관에서 마련해준 점심오찬에 참가하였다. 한국대사는 일정이 있어서 못 나오고 조상훈, 최종희 두 서기관과 평통위원 신인근씨와 좋은 자리를 가졌다. 밥 한 끼 먹는 일 사소한 일 인 것 같지만 밥 한 끼 먹는 일 대단한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귀한 시간 내어야하고 그럴 마음을 가지려면 정성이 필요하다. 그것으로 한국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고 더더욱 내가 하는 일의 무게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오후에 남는 시간에 잠시 성 사바 성당에 들렀다. 성 사바 성당은 세계 최대의 정교회이다. 세르비아 정교회의 창시자이자 초대 대주교인 성 사바를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세르비아 왕국의 스테판 네마냐 왕은 비잔틴 제국의 종교를 받아들였고, 그의 아들 사바 네마니치(성 사바)는 정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세르비아의 독립 정교회를 수립해 세르비아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안에 들어가 보니 내부는 수리 중이라 어수선했다.
로마제국은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열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마는 게르만족에게 멸망을 당했고, 동로마는 15세기에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을 당할 때까지 동유럽에서 번창하였다. 이때 기독교도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로 나뉘었다. 동유럽 사람들은 동방정교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다 오스만 제국이 코소보에서 완강하게 버티던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인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물리치고 발칸 반도는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이나 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관광객에게는 별로 매력적이지 못한 도시가 베오그라드이다. 베오그라드의 아침 안개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한들 그것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여행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화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하고, 전쟁의 상흔이 얼마나 쓰라린가를 보고, 또 따뜻한 인정을 만나고 싶거든 베오그라드로 오라! 베오그라드가 당신을 반가이 맞을 것이다. 여행이 끝나고 여행 가방을 정리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경관이 좋은 관광지나 문화유산이 아니라 사람들과 만나서 주고받는 눈 맞춤과 섬세한 감정의 교류이다.
흔히 아름다움은 피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름다움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감동이 얼마나 많은가. 세르비아에서는 일기예보에 없던 천둥번개가 몰아치듯이 느닷없이 만나는 기쁨이 있다. 아름다움은 늘 가슴 설레는 경이(驚異)이다. 사람들과 눈 맞추고 마음 맞추었을 때 맺어지는 영롱한 진주알 같은 감정의 조각들이 그렇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상상력과 아름다움과 모험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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