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달러의 기적 2] 14세 소년이 북에서 맞은 해방
'8달러의 기적'은 재미과학자 한도원 박사(84)의 일대기 입니다. 현재
올랜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도원 박사의 일생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면서 귀중한 현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제약회사인 존슨앤존슨에서 33년 동안 재직한 한도원 박사는 1989년 동료 존 맥과이어 박사와 함께 경구 피임약 '제3세대 신약'으로 일컬어지는 노개스티메이트를 최초로 발견.개발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 기자 주
(올랜도) 김명곤 기자
내가 해방을 맞은 것은 안주 중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인
학생들이 다니던 우리 학교는 물론, 다른 일본계 학교 학생들도 안주 인근에 비행장을 건설한다며 날마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땅을
고르거나 돌을 나르게 하는 등 노역을 시켰다. 1학년 때만 해도 그런대로 수업일을 지켜 공부를 시켰으나, 2학년에 이르러서는
수업은 뒷전으로 미루고 작업에만 매달리게 했었다.
당시 일본군이 계속 패주하고 있으며, 소련이 곧 참전하게 되어 전세가 일본에게 더욱 불리해 질 것이란 소문들이 암암리에 나돌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 유격대가 함경북도 보천군의 일본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를 습격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는 무용담이 나돌고 있었고, 40년대 초반을 지나 중반에 가까워 지면서 일본군이
패주하고 있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어느날부터 일본 순사들을 동원한 군청 직원들이 우리 동네에 나타나 놋그릇이란 놋그릇은 모두 뒤져서 가져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날 어머니가 한쪽 툇마루에 주저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연신 혀를 차던 장면이 떠오른다. 시집올 때, 그리고 대
식구들의 식생활과 농사철 일꾼 밥상을 차리기 위해 이래 저래 장만한 놋그롯들을 몽땅 공출 당했던 것이다.
어수선 하고 팍팍하던 시절을 지내던 어느날 해방의 소식이 들려왔다. 나중에 들으니 다른 지역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도둑같이 온
해방'의 기쁨에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내가 안주에서 맞은 해방은 조용했다. 후창이나 안주
지역은 비교적 소도시 지역이기도 했고, 이미 전쟁의 뒷끝이 보이던 국경지역이어서 였는지 담담한 분위기로 해방을 맞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해방 며칠
후부터 이미 상당수의 선생님들은 학교를 떠나기 시작했고. 학생들도 하나 둘씩 짐을 꾸려 고향으로 향하면서 학교는 텅 비어 가고
있었다. 너도 나도 떠나는 분위기에서 나도 서둘러 짐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기약도 없고 생경하기만 한 새로운 세상에서
2년여 간의 '방학'을 체험해야만 했다.
"로스케가 온다!"… 시계를 주고 자전거를 얻다
해방 초기는 기대감과 동시에 불안감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분위기였다. 거리에는 여전히 관청에 남아 있거나 미처 재산과
살림을 챙기지 못한 일본인들과 생판 처음 보는 소련군들이 뒤섞여 활보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밀려들기 시작한 소련군이
북쪽 지역 중소 도시는 물론 시골 마을에 까지 들어 오면서 불안은 커지기 시작했다.
거의 거지 꼴을 한 남루한 옷에 얼굴에 팔뚝에 수염과 털이 숭숭 난 소련군들이 양곡이나 채소를 강탈하는 것은 물론, 여자들을
겁간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다. 배개만한 큰 빵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로스케'들이 노소를 가리지
않고 여자란 여자는 모두 잡아 가고, 남아 있던 일본 여자들까지 표적으로 삼는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어느 곳에서는 참다 못한
조선인 청년들이 소련 병사들을 폭행했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우리 동네는
물론 이웃 동네들에서도 이 같은 흉흉한 소문에 남자들끼리 자경단을 구성하여 동네 어귀에서 차례로 망을 보며 소련군의 동태를
감시하곤 했다. 동네 인근의 냇가 부근에 텐트를 치고 주둔하던 소련군 병사들이 어느때 나타나 일을 저지를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할머니가 사는 집이나 산으로 피신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소련군 사병들 가운데
감옥에서 징집되어 끌려온 죄수들이 다수 섞여 있어서 이들이 주로 악행을 저지른다고 했다.
소련군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소련군들은 시계를 몹시 좋아하여 양쪽 팔뚝에 시계를 여러 개
차고 활보하곤 했는데, 어느날 소련군이 길가던 나를 세워 놓고 팔뚝을 걷어 올리게 하고는 시계를 달라고 했다. 내가 겁에 질려
머뭇거리자 그는 끌고 가던 자전거를 내게 주면서 바꾸자고 했다. 엉겁결에 자전거를 받아 타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새것이나 다름없는 고급 자전거 였다. 자전거가 매우 비싸고 귀하던 시절에 느닷없이 고급 외제 자전거의 주인이 되어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아마도 내가 만난 소련군은 그나마 마음 좋은 장교였던 것 같다.
'지주의 아들'이 겪은 생경한 세상
불안한 것은 소련군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서 군중집회가 열리고, 누구 누구가 잡혀가고 처형되었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건국준비위원회니 인민위원회니 하는 단체들에 이어 붉은 완장을 두른 청년 단체들이 생겨났고, 청소년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각종
단체에 가입하거나 집회에 참석하라는 통보가 집집마다 하달되기 시작했다. 14세 소년에 불과했던 나는 물론이거니와 2살 아래
동생까지도 '소년단 집회'에 참가한다며 뻔질나게 불려 나가곤 했다. 나의 가족은 이른바 '사상 개조'의 대상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지주 반동분자'라며 이미 잡혀가서 행방을 몰라 전전긍긍하던 처지였고, 어머니는 백방으로 아버지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자본가를 매장시켜라!" 등의 슬로건이 적힌 플랭카드와 빨간 깃발들이 내걸려
있었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생경한 광경들에 나는 '해방'된 느낌보다는 또다른 압제에 짓눌리는 듯 했다. 정작 무슨 무슨 학습
집회에 참석하여 마르크스니 레닌이니 하는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이론을 학습하자니 생소하기만 했고, 가슴에 썩 닥아오지도 않았다.
공산혁명을
이해하기에는 나이가 어리기도 했고, 특히 내가 읽은 많은 세계 명작들에서 맛본 세상은 사람의 머릿속을 획일화하고 강제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를 키워준 가족과 어린시절 고향산천에서 마음껏 뛰놀며 꾼 꿈들은 로스케들과 그 동조자들이 꿈꾸는
세상에서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운 세상'은 진지한 인간관계에 막 눈뜨기 시작하던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어렷을 적부터 장난스레 우정을 나누던
꾀복동이 친구들과 급우들 가운데는 이미 성분 좋은 무산자의 자녀라며 빨간색 청년단장 완장을 차고 목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들의
형제들도 여기 저기 취직이 되어 새로운 세상에서 그들만의 꿈에 젖어 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빛과 행동거지가 달라져 가는 것을
보고는 내심으로 인간 심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그들이 가져올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질감을 느껴야 했다.
해방이 된 지 2년 가까이 된 1947년 어느날이었다. 무슨 청년 단체에서 하는 학습 모임에 참석했다가 나보다 두어살 연배인
듯한 청년을 사귀게 되었다. 서울이 고향인 그는 북쪽의 이모 집에 자주 놀러왔다 서울로 돌아가곤 한다며 해방 뒤에도 몇차례
삼팔선을 넘나들었는데, 며칠 후에 서울로 돌아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서울에 가서 얼마든지 좋은 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는 말까지
하며 함께 가자고 했다.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였다.
2년여 동안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하였고, 언제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될 지 기약이 없을 뿐더러,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하릴없는 세월을 보내던 처지에서 한여름 단비와 같은 소리였다. 가슴이 뛰었다. 나는 즉시 어머니에게 달려가 그 청년의 말을 전하며
서울로 가겠다는 결심을 말했다. 어머니는 펄쩍 뛰시며 "굶어도 함께 굶고, 죽어도 여기서 함께 죽는 게 낫다"며 반대했다.
아버지가 잡혀가고 없는 상황에서, 장남에 장손인 나를 멀리 떠나보낸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마음가짐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이미 결심이 선 나는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있었다. 누구보다도 강렬한 어머니의 '교육열'에
기대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 즈음 들어 어머니는 "2년 가까이 학교에도 못 가고 빈둥거리는 게 영 마음에 걸린다"며 나의
장래를 염려하던 터였다. 나는 "서울에 가면 일류학교에 입학하여 보라는 듯이 모범생 노릇을 하겠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재차
설득했다.
'야반 남행'을 결심하다
한참을 생각하시던 어머니는 "좋은 학교에 공부하러 간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듯 했고, "학교에도 못 가고 집에 있느니
차라리 서울에 가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나는 이 틈을 타서 얼른 "내년 여름 방학에 돌아올 텐데 무에
그리 걱정입매!"라고 투정하는 투로 내뱉었다. 그리고는 "내일 모레면 남으로 내려가는 트럭이 오는데, 그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못을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내심으로는 허락할 심산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남편이 잡혀가서 소식이 없는 마당에 일단 장남이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있다가 상황을 보아서 재회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도, 어머니도 삼팔선이 콩크리트 장벽보다 강하고 높은 선이 되어
영영 넘나들지 못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설득 당하는 척 나의 남행을 순순히 허락하셨던 것이다.
(*구술 정리 및 스토리 구성 : 김명곤 기자)
'8달러의 기적'은 재미과학자 한도원 박사(84)의 일대기 입니다. 현재
올랜도에 거주하고 있는 한도원 박사의 일생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면서 귀중한 현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하여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제약회사인 존슨앤존슨에서 33년 동안 재직한 한도원 박사는 1989년 동료 존 맥과이어 박사와 함께 경구 피임약 '제3세대 신약'으로 일컬어지는 노개스티메이트를 최초로 발견.개발하는 개가를 올렸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 기자 주
▲ 한도원 박사. |
내가 해방을 맞은 것은 안주 중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다. 한국인
학생들이 다니던 우리 학교는 물론, 다른 일본계 학교 학생들도 안주 인근에 비행장을 건설한다며 날마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땅을
고르거나 돌을 나르게 하는 등 노역을 시켰다. 1학년 때만 해도 그런대로 수업일을 지켜 공부를 시켰으나, 2학년에 이르러서는
수업은 뒷전으로 미루고 작업에만 매달리게 했었다.
당시 일본군이 계속 패주하고 있으며, 소련이 곧 참전하게 되어 전세가 일본에게 더욱 불리해 질 것이란 소문들이 암암리에 나돌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 사이에서는 1930년대 후반부터 만주 지역의 항일 무장 유격대가 함경북도 보천군의 일본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를 습격하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는 무용담이 나돌고 있었고, 40년대 초반을 지나 중반에 가까워 지면서 일본군이
패주하고 있는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어느날부터 일본 순사들을 동원한 군청 직원들이 우리 동네에 나타나 놋그릇이란 놋그릇은 모두 뒤져서 가져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날 어머니가 한쪽 툇마루에 주저 앉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연신 혀를 차던 장면이 떠오른다. 시집올 때, 그리고 대
식구들의 식생활과 농사철 일꾼 밥상을 차리기 위해 이래 저래 장만한 놋그롯들을 몽땅 공출 당했던 것이다.
어수선 하고 팍팍하던 시절을 지내던 어느날 해방의 소식이 들려왔다. 나중에 들으니 다른 지역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도둑같이 온
해방'의 기쁨에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지만, 내가 안주에서 맞은 해방은 조용했다. 후창이나 안주
지역은 비교적 소도시 지역이기도 했고, 이미 전쟁의 뒷끝이 보이던 국경지역이어서 였는지 담담한 분위기로 해방을 맞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 우에츠 요시로 일본군 참모총장이 1945년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 문서에 공식 서명하고 있다. (지난 4월 16일 (사)월드피스자유연합이 광화문에서 전시한 해방전후 사진전에 전시한 사진들 가운데 하나다.) |
후부터 이미 상당수의 선생님들은 학교를 떠나기 시작했고. 학생들도 하나 둘씩 짐을 꾸려 고향으로 향하면서 학교는 텅 비어 가고
있었다. 너도 나도 떠나는 분위기에서 나도 서둘러 짐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로 기약도 없고 생경하기만 한 새로운 세상에서
2년여 간의 '방학'을 체험해야만 했다.
"로스케가 온다!"… 시계를 주고 자전거를 얻다
해방 초기는 기대감과 동시에 불안감으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런 분위기였다. 거리에는 여전히 관청에 남아 있거나 미처 재산과
살림을 챙기지 못한 일본인들과 생판 처음 보는 소련군들이 뒤섞여 활보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밀려들기 시작한 소련군이
북쪽 지역 중소 도시는 물론 시골 마을에 까지 들어 오면서 불안은 커지기 시작했다.
거의 거지 꼴을 한 남루한 옷에 얼굴에 팔뚝에 수염과 털이 숭숭 난 소련군들이 양곡이나 채소를 강탈하는 것은 물론, 여자들을
겁간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다. 배개만한 큰 빵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로스케'들이 노소를 가리지
않고 여자란 여자는 모두 잡아 가고, 남아 있던 일본 여자들까지 표적으로 삼는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어느 곳에서는 참다 못한
조선인 청년들이 소련 병사들을 폭행했다는 얘기까지 들려왔다.
▲ 해방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상당수 병사(일부 기록 30%)가 강제 징병당한 죄수들로 알려져 있다. 각종 만행을 접한 북한 주민들은 이들을 로스케 로 부르며 피했다. (지난 4월 16일 (사)월드피스자유연합이 광화문에서 전시한 해방전후 사진전에 전시한 사진들 가운데 하나다.) |
물론 이웃 동네들에서도 이 같은 흉흉한 소문에 남자들끼리 자경단을 구성하여 동네 어귀에서 차례로 망을 보며 소련군의 동태를
감시하곤 했다. 동네 인근의 냇가 부근에 텐트를 치고 주둔하던 소련군 병사들이 어느때 나타나 일을 저지를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어머니도 할머니가 사는 집이나 산으로 피신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나중에 들으니 소련군 사병들 가운데
감옥에서 징집되어 끌려온 죄수들이 다수 섞여 있어서 이들이 주로 악행을 저지른다고 했다.
소련군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을 참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소련군들은 시계를 몹시 좋아하여 양쪽 팔뚝에 시계를 여러 개
차고 활보하곤 했는데, 어느날 소련군이 길가던 나를 세워 놓고 팔뚝을 걷어 올리게 하고는 시계를 달라고 했다. 내가 겁에 질려
머뭇거리자 그는 끌고 가던 자전거를 내게 주면서 바꾸자고 했다. 엉겁결에 자전거를 받아 타고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와서 보니
새것이나 다름없는 고급 자전거 였다. 자전거가 매우 비싸고 귀하던 시절에 느닷없이 고급 외제 자전거의 주인이 되어 얼마나 기분이
좋았던지! 아마도 내가 만난 소련군은 그나마 마음 좋은 장교였던 것 같다.
'지주의 아들'이 겪은 생경한 세상
불안한 것은 소련군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여기 저기서 군중집회가 열리고, 누구 누구가 잡혀가고 처형되었다는 소식들이 들려왔다.
건국준비위원회니 인민위원회니 하는 단체들에 이어 붉은 완장을 두른 청년 단체들이 생겨났고, 청소년부터 어른들에 이르기까지 각종
단체에 가입하거나 집회에 참석하라는 통보가 집집마다 하달되기 시작했다. 14세 소년에 불과했던 나는 물론이거니와 2살 아래
동생까지도 '소년단 집회'에 참가한다며 뻔질나게 불려 나가곤 했다. 나의 가족은 이른바 '사상 개조'의 대상이었다.
우리 아버지도 '지주 반동분자'라며 이미 잡혀가서 행방을 몰라 전전긍긍하던 처지였고, 어머니는 백방으로 아버지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김일성 장군 만세", "자본가를 매장시켜라!" 등의 슬로건이 적힌 플랭카드와 빨간 깃발들이 내걸려
있었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생경한 광경들에 나는 '해방'된 느낌보다는 또다른 압제에 짓눌리는 듯 했다. 정작 무슨 무슨 학습
집회에 참석하여 마르크스니 레닌이니 하는 공산주의 사상가들의 이론을 학습하자니 생소하기만 했고, 가슴에 썩 닥아오지도 않았다.
▲ 나의 어머니 조완옥(우)과 아버지 한성범(좌). 1990년 10월 북한을 방문했을 때 형제들로부터 받은 회갑사진이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뜨셨고, 어머니는 6개월 전에 세상을 뜨셨다. ⓒ 한도원 |
이해하기에는 나이가 어리기도 했고, 특히 내가 읽은 많은 세계 명작들에서 맛본 세상은 사람의 머릿속을 획일화하고 강제하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더구나 나를 키워준 가족과 어린시절 고향산천에서 마음껏 뛰놀며 꾼 꿈들은 로스케들과 그 동조자들이 꿈꾸는
세상에서는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운 세상'은 진지한 인간관계에 막 눈뜨기 시작하던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어렷을 적부터 장난스레 우정을 나누던
꾀복동이 친구들과 급우들 가운데는 이미 성분 좋은 무산자의 자녀라며 빨간색 청년단장 완장을 차고 목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들의
형제들도 여기 저기 취직이 되어 새로운 세상에서 그들만의 꿈에 젖어 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눈빛과 행동거지가 달라져 가는 것을
보고는 내심으로 인간 심성에 대한 회의와 함께 그들이 가져올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질감을 느껴야 했다.
해방이 된 지 2년 가까이 된 1947년 어느날이었다. 무슨 청년 단체에서 하는 학습 모임에 참석했다가 나보다 두어살 연배인
듯한 청년을 사귀게 되었다. 서울이 고향인 그는 북쪽의 이모 집에 자주 놀러왔다 서울로 돌아가곤 한다며 해방 뒤에도 몇차례
삼팔선을 넘나들었는데, 며칠 후에 서울로 돌아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서울에 가서 얼마든지 좋은 학교에도 다닐 수 있다는 말까지
하며 함께 가자고 했다.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였다.
2년여 동안 학교 근처에도 가지 못하였고, 언제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될 지 기약이 없을 뿐더러, 장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하릴없는 세월을 보내던 처지에서 한여름 단비와 같은 소리였다. 가슴이 뛰었다. 나는 즉시 어머니에게 달려가 그 청년의 말을 전하며
서울로 가겠다는 결심을 말했다. 어머니는 펄쩍 뛰시며 "굶어도 함께 굶고, 죽어도 여기서 함께 죽는 게 낫다"며 반대했다.
아버지가 잡혀가고 없는 상황에서, 장남에 장손인 나를 멀리 떠나보낸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마음가짐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이미 결심이 선 나는 어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머리에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있었다. 누구보다도 강렬한 어머니의 '교육열'에
기대어 보기로 한 것이다. 그 즈음 들어 어머니는 "2년 가까이 학교에도 못 가고 빈둥거리는 게 영 마음에 걸린다"며 나의
장래를 염려하던 터였다. 나는 "서울에 가면 일류학교에 입학하여 보라는 듯이 모범생 노릇을 하겠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재차
설득했다.
'야반 남행'을 결심하다
한참을 생각하시던 어머니는 "좋은 학교에 공부하러 간다"는 말에 마음이 움직이는 듯 했고, "학교에도 못 가고 집에 있느니
차라리 서울에 가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나는 이 틈을 타서 얼른 "내년 여름 방학에 돌아올 텐데 무에
그리 걱정입매!"라고 투정하는 투로 내뱉었다. 그리고는 "내일 모레면 남으로 내려가는 트럭이 오는데, 그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못을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내심으로는 허락할 심산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남편이 잡혀가서 소식이 없는 마당에 일단 장남이 서울에 가서 공부하고
있다가 상황을 보아서 재회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나도, 어머니도 삼팔선이 콩크리트 장벽보다 강하고 높은 선이 되어
영영 넘나들지 못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설득 당하는 척 나의 남행을 순순히 허락하셨던 것이다.
(*구술 정리 및 스토리 구성 : 김명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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