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도심공원에 위치한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틴토레토(Tintoretto, 1518-1594) 탄생 500주년 기념전 ‘천재탄생’이 3월 7일부터 7월 1일까지 열린다. 르네상스시대를 대변하는 틴토레토의 작품 100여점이 한곳에 모인 것은 이례적이라 장안의 화제가 되는 전시다.
전시작품은 7개 테마로 구분하여, 16세기 코즈모폴리턴 베니스에서 야망을 불살랐던 젊은 작가에게로 포커스를 맞춘다.
1단계 ‘도약’을 시작으로 ‘살롱 장식하기’, ‘시선 끌기’, ‘아틀리에 공유’, ‘연극무대 연출’, ‘조각품 관찰’, ‘여성을 그린다는 것’ 순서로 작가가 20대에서 30대에 걸치는 초기 15년 동안의 활동을 단계적으로 집중 조명한다.
자칫 우리의 취향과 감각과는 동떨어진 빛바랜 구식 전시회로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욕망으로, 틴토레토는 오늘날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 야망, 집념, 재능을 지닌 젊은 작가가 어떻게 치열한 경쟁사회를 뚫고 독보적인 자리매김을 했는지 재음미해보기로 한다.
▶ 그림으로 도약하기
500년 전 베니스에서 태어난 틴토레토는 어릴 적부터 염색공이었던 부친의 물감으로 벽에 낙서를 즐겼는데, 거의 훌륭한 벽화에 가까웠다고 한다. 불어로 텡토레(Tintoret),인 그의 본명은 자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로 알려져 있다. 틴토레토는 ‘어린 염색공’이라는 뜻으로, 염색공 아들이 사회적 신분상승을 추구했다는데서 생겨난 별명이다.
당시 베네치아는 세습적인 계급사회였다. 염색공은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신분상승이 불가능한 계층이었다. 그럼에도 틴토레토는 상류사회로 진출하고자 하는 야망을 품었다. 그 방법은 오직 하나, 화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그는 20세 이전에 부친의 공장을 아틀리에로 사용하며 프로 화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베니스의 유명화가 티치아노(Titien, 1488-1576년)를 사부로 삼았으나, 곧 스승과 어깨를 견줄만한 독자적인 화법을 구축했다.
‘천재탄생’ 전시회 첫 단계에서 그의 무명시절의 습작품들, 장식용 작은 화폭들, 크로키, 데생, 초상화들이 선보이는데, 이들 초기 작품에서 이미 불굴의 집념과 천재성이 엿보인다는 평이다.
그의 초기작품들이 지오반니 갈리지(Giovanni Galizzi)의 작품일 것이라는 학설도 1995년에 발표되었다. 아직 검증과 연구가 더 필요한 사항이다.
1544년경부터 두 젊은 화가는 아틀리에를 공동으로 사용했는데, 틴토레토가 본격적으로 프로화가로 활동하던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아틀리에 공동작업’ 섹션에서 ‘금송아지에 대한 숭배(1544년)’ 등을 포함하여 두 화가의 공동제작 작품들이 상당수 전시되고 있다. 두 화가의 관계는 1554년 이후 결렬된 것으로 전해진다.
▶ 동료로부터 미움 받는 야심가
당대 베니스는 예술시장이 형성되어 화가들이 데생이나 화폭을 팔거나, 부유층의 가구, 살롱의 벽, 천장을 장식해주는 일 등을 주문받았다. 경쟁이 치열한 그림시장에서 틴토레토는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장사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베니스 한 귀족이 저택의 천장 장식그림을 위탁할 화가를 선택하고자 4명을 소환했을 때의 일이다. 다른 동료들보다 먼저, 틴토레토는 천장의 크기를 정확하게 측정하여 어느 구석에도 흠이 없는 완벽한 구도로 그려진 가상작품의 도안을 저택주인에게 제시했다. 이어서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고 협상했다. 다른 동료화가들이 반칙이라며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은 물론이다.
완성된 천장그림은 주인의 마음에 들었고, 이후 틴토레토는 그의 단골화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베니스 귀족도 소개받았다. 이렇게 그는 점차적으로 상류사회와 인맥을 쌓아갔다.
틴토레토는 초상화 제작에서도 동료들과의 경쟁을 물리치고자 재료비만 받을 때도 있었다. 당연히 이러한 수완에 그에 대한 악평이 뒤따랐던 것은 물론이다.
▶ 바이킹족 같은 전투력을 지닌 아티스트
동료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젊은 화가는 종교화, 천장화, 벽화, 초상화 등을 가능하면 많이 주문받고자 했는데, 이는 작품전시를 통해 동시대인들의 눈과 영혼을 과감하게 자극하고 유혹하고자 하는 집념이 남달리 강했기 때문이다.
그는 관객의 시선을 화폭의 한 초점을 향해 집중하도록 하는 뛰어난 구도감각을 발휘했고,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포지션으로 인물들을 그렸다. 배경에 많은 기둥들을 세우고 포석의 사각형을 이용한 대담한 원근법과 음영효과로 화폭에 깊이를 가미했다. 여기에 부친의 염색물감으로 단련된 대담한 색체감각도 곁들였다.
게다가 그는 높이 6m, 길이 12m에 이르는 초대형 캔버스도 사용했는데, 여기에 불어넣는 패기, 열정은 바이킹족들의 전투력과도 비교될 정도였다. 화폭에 쏟아 붓는 메가톤급 폭발력과 더불어 작품을 완성하는 속도도 남보다 앞섰다.
틴토레토는 어떤 사물이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빨리 스케치하는 능력을 지녔다. 이렇듯 자유롭고 빠른 붓질동작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인 불후의 화법을 구축했는데, 당대 큰 명성을 지녔던 베네치아 화가 파울로 베로네세(1528년-1588년)마저 두려운 라이벌로 여겼을 정도였다.
▶ 연극과 조각에도 조예가 깊었던 화가
간혹 화폭 속의 인물들 옷차림이 연극배우들의 무대의상을 방불케 하기도 한다. 실제로 틴토레토는 극단의 무대복장을 디자인했으며, 무대장식과 연출에도 깊은 조예를 지녔던 것으로 전해진다.
1442년부터 1565년 사이에 베니스에는 50여개 극단이 존재했고, 당대 유명 연극배우이자 작가였던 안드레아 칼모(Andrea Calmo, 1510-1571년)와도 깊은 친교를 맺었다.
뤽상부르 전시회장에서 ‘솔로몬과 시바여왕(1546년-1548년)’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화폭 중 하나다. 솔로몬과 시바의 만남을 연극단원들이 무대에서 공연하는 것처럼 재현한 화폭이다. 여기에서 시바여왕은 정숙한 모습의 비너스 상을 모방했다.
이렇듯 틴토레토는 그림모델의 영감을 고대 혹은 동시대 조각품들에서 고취하기도 했다. 그의 아틀리에는 데생에 필요한 조각품들로 꽉 찼으며, 특히 미켈란젤로의 작품복사본을 로마에서 배달받는데 그 비용을 아낌없이 투자했다고 한다. 이들 모조품들을 등잔불에 비춰 음영을 꼼꼼히 관찰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그려내는 훈련을 하면서 대담한 구도를 화폭에 도입하곤 했다.
그의 화폭구도가 독특한 공간효과를 주는 3차원으로 표현되는 것도 바로 조각품 관찰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이뿐만 아니라 각종 수공업자들의 제작과정도 세심하게 관찰하며 연구했다.
▶ 유명한 이브의 누드화
틴토레토 기념전에서 1551년과 1556년 사이에 제작한 여성누드화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틴토레토는 여성누드화를 많이 제작했는데, 여기에서 여성이라 함은 이브를 포함하여,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요정들, 귀족부인, 공주, 하녀, 창녀 모두를 망라한다. 누드화마다 매력과 관능미가 첨가되고, 때로는 성의 대상물로도 그려진다.
누드화 섹션에서 당연 천국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모습을 담은 화폭 ‘원죄(1551년)’를 빼놓을 수 없다. 이브의 시선은 살짝 관객을 향해 바라보고, 작은 나뭇잎으로 중요부분만 살짝 감춘 모습에서 관능미마저 흘러나온다. 옅은 장밋빛 피부색에는 작가의 미묘한 감수성마저 스며있다. 이브의 누드는 화폭 배경풍경에서 돌출되고, 손에 들려진 사과는 ‘원죄는 계속 지속될 것이다’라는 암시를 전한다. 19세기까지 후배 화가들이 모방했던 유명한 이브의 모습이다.
전시회 포스터로 사용된 ‘자화상(1547년)’에서, 틴토레토 역시 관객을 향해 살짝 시선을 돌리고 있는데 눈빛은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동시에 야심만만함과 고뇌가 복합적으로 섞여있다. 작가의 영혼을 담은 자화상의 배경은 장식 없이 빛의 음영만으로 자신의 모습을 소박하게 그려냈다. 보편적으로 그의 작품세계가 허식이나 과장 없이 소박함을 담고 있다는 평가이다.
이렇듯 전시작품들은 1555년까지의 젊은 미스터리 틴토레토를 재조명한다. 이후 1594년 별세하기까지, 그는 동시대로부터 인정받는 천재화가로서 최고 정상에서 군림했다.
틴토레토의 기념전을 통해서도 천재는 99%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진실을 재확인할 수 있다. 그는 작업실 벽에 그림을 그렸다가 지우고 또 덧칠을 하면서 화폭에 새로운 비전과 기법을 가미하기 위해 늘 반복연습하고 실험했다. 더 나아가 16세기 코즈모폴리턴 베니스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을 주시하고 관찰하며, 이를 제대로 활용했던 집념의 아티스트였다.
【프랑스(파리)=한위클리】 이병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