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에 보내는 편지
Newsroh=장호준 칼럼니스트
재판장님,
제가 한국을 떠난 것은 1989년 이었습니다. 6년간의 선교사 생활을 마치고 잠시 귀국해서 목회(牧會)를 했던 기간이 있었지만 1999년 미국으로 이주함으로 하여 아버님께서 살해 당하신 이후 제 삶의 4분의 3을 해외에서 보냈으며 미국에 정착한지는 20년이 되어갑니다.
일심재판에 출석 하지 못했던 이유는 여권 무효화 조치로 인해 출국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 제 삶의 터전인 미국으로 돌아 올 수 없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했고 이는 현재 제가 삶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스쿨버스 운전직으로 유지하는 생계에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끼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아버님으로부터 깨끗한 동전 한 푼도 물려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친일을 하면 삼대가 부자로 살며, 항일을 하면 삼대가 쪽박을 찬다” 거나 “민주를 외치면 삼대가 고문을 당하고, 독재를 저지르면 삼대가 권력을 휘두른다”는 말 따위는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자들이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대한민국에서 오히려 제게 도전이 되는 말이었을 뿐입니다.
물론 아무리 경제적으로 힘겹게 하루의 삶을 유지해 간다 하더라도 어머님의 위독함을 접하게 되었을 때는 항소를 포기하고 귀국하는 것이 인륜을 지키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 날 수 없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의 마지막 숨을 내어 주심으로서 제게 정의로운 일을 위해, 항소를 포기 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라는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이상이 제가 재판에 출석하지 못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점차 드러나고 있는 사법부의 추악한 불의함은 제게 과연 현 대한민국 사법부가 정의를 들먹이며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은 고사하고 자격이라도 갖추고 있는지를 의심 하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오로지 저울의 기울어진 쪽 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정의의 여신’ 손가락 끝에서 농락(籠絡)당하고 있는 사법정의가 ‘역사적 신념’과 ‘신앙적 양심’에 대해 심판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넘어 ‘위안부 피해자’, ‘강제 징용자’에 대한 재판 개입을 통해 사법부가 저지른 반민족적 행위는 저로 하여금 더이상 대한민국 사법부를 신뢰의 대상은 커녕, 고려의 대상으로조차도 삼지 않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 이유로하여 저는 재판에 출석하지 못하는 이유를 진술함이 오히려 수치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에 이상과 같은 이유를 통해 재판에 출석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출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진술 하는 것입니다.
자연이 오염되는 것에 대해 심각한 두려움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 그 자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며 그 오염된 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을 죽게 만들기 때문이듯,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교회의 죄악에 제가 분노하고 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것 역시 제 스스로 그 교회라는 물속에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는 예수의 말이 오늘 사법부에 들려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모기지, 죽음의 서약
나와의 약속이 더 중요하다
‘Mortgage’ 흔히 ‘모기지’라고 부르는 단어입니다.
어원은 프랑스말이라고 하는데 ‘mort' 와 ’gage'가 묶여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합니다.
프랑스어를 찾아보시면 아시겠지만 ‘mort'는 ’death(죽음)' 이고 ‘gage'는 ’pledge(서약)‘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단어가 합성되어 결국 ’죽음의 서약(誓約)‘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집을 구입하면서 빌린 모기지는 죽음으로 맺은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빌리면서 ‘죽어도 갚겠다.’는 약속을 한다는 것입니다.
모기지가 아니어도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죽어도’ 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맺는 약속들이 있습니다. 결혼서약에서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결혼서약’이나 ‘모기지’처럼 상대가 있는 약속보다 더 지키기 힘들면서 또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상대가 없는 즉 자신과의 약속이 아닌가 합니다.
‘모기지’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집을 빼앗기게 된다는 두려움으로 매달 정해진 분할금(分割金)을 내게 되지만, 어느 누구도 통제하거나 위협하지 않는 내 자신과의 약속은 결국 내가 채무자이며 또한 내가 채권자가 되기에 나 스스로에게 채무를 변제 해 주는 어리석음으로 합리화 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여름도 끝나고 가을이 다가오는데 내가 나와 맺은 ‘mortgage'를 되돌아봅니다.
나는 그 ‘죽음의 서약’을 지키고 있는지...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장호준의 Awesome 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