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멕시코부터 2016폴란드까지
Newsroh=로빈 칼럼니스트
정확히 36년이다. 1983년 6월 멕시코에서 연일 전해진 勝戰報(승전보)는 3년전 광주를 희생양으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군부의 철권통치에 짓눌린 국민들의 울분을 잠시나마 씻어준 쾌거였다.
83세계청소년축구대회는 한국축구사의 찬란한 金字塔(금자탑)이다. 한국축구는 1983년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FIFA가 주관하는 세계대회에서 거둔 최초의 4강 기록이후 한국축구는 본격적으로 세계화의 길을 걸었다.
이 대회에서 보여준 놀랄만한 경기력으로 한국 대표팀은 외신으로부터 ‘붉은악마(Red Devil)’라는 별명이 獻呈(헌정)되었다. 사실 붉은악마는 유럽의 ‘축구 강소국’ 벨기에의 별명이었지만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엄청난 열기의 거리응원을 계기로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별명이 되었다.
멕시코 4강신화로 한국축구는 세계적인 강팀들과 당당히 맞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처음 갖게 되었고 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32년만에 본선 진출의 숙원을 달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83년 멕시코 U20월드컵에서 ‘독사’라는 별명의 박종환 감독은 강인한 체력을 바탕으로 팔색조의 다채로운 전술을 펼쳤다.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팀웍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개인기를 보충하고도 남았다. 조예선 첫 경기(6월 3일) 스코틀랜드전(0-2)에서 우리 선수들은 10만명이 넘는 대관중이 열광하는 경기장 분위기에 압도돼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이틀후인 멕시코전에선 정신무장을 새로이 하고 벌떼축구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주최국 멕시코는 첫 경기 호주전을 비기고 한국을 1승 제물로 삼기 위해 섭씨 35도에 달하는 시간대에 경기편성을 했지만 박종환사단은 고지대에서 마스크를 끼고 체력강화훈련을 할만큼 만반의 태세를 갖춘 뒤였다.
멕시코가 전반 10분 선제골을 넣었지만 29분에 노인우의 동점골로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후반들어 오히려 멕시코 선수들이 체력적인 문제를 드러내자 한국선수들은 더욱 세차게 상대를 몰아부쳤고 후반 종료 직전 신연호가 결승골을 터뜨려 홈관중들을 경악케 했다.
박종환사단의 진정한 힘은 그때가 시작이었다. 조 예선 마지막 경기인 호주전(6월 8일)에서 전반 16분 김종건, 34분 김종부가 잇따라 골을 터뜨려 2-1로 승리했고 호주는 스코틀랜드에 이어 득실차 2위로 8강전에 올랐다.
6월 11일 몬테레이에서 열린 남미 강호 우루과이와의 8강전은 대회 최고의 하이라이트였다. 한국은 김종부와 함께 최고의 스타로 떠오른 신연호가 전반 34분 선제골을 작렬시켰다. 허점이 찔린 우루과이는 후반 16분 동점골을 터뜨려 이 대회 최초의 연장전으로 끌고 갔다.
벌떼축구의 기세는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연장 전반 14분 신연호의 결승골이 터지자 지구 반대편에서 위성생중계를 지켜보던 전 국민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세계청소년축구 4강의 기적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한국은 세계 최강 브라질과 결승티켓을 다투게 됐고 또다른 대진은 아르헨티나와 폴란드였다. 6월 15일 몬테레이에서 열린 준결승전에서 한국은 브라질의 명성을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 선수들처럼 겁이 없었고 전반 14분 김종부가 선제골을 떠뜨리는 맹위를 떨쳤다.
한국은 8분뒤 동점골에 성공한 브라질과 一進一退(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치다 후반 36분 뼈아픈 역전골을 허용했다. 더 이상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영원한 우승후보 브라질과 대등한 경기를 한 것만으로도 한국축구는 세계를 놀라게 했다.
브라질은 결승에서 숙적 아르헨티나를 1-0으로 제압하며 결국 우승 트로피를 안았다. 한국은 폴란드와의 3-4위전에서 이기근이 선제골을 넣었지만 대회 두 번째 연장까지 가는 격전 끝에 2-1로 분루를 삼켰다.
멕시코 4강신화를 달성한 이후 한국 축구는 남북단일팀을 이룬 1991년 대회와 2009년, 2013년 대회 등 이후 3차례 8강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2019년 폴란드 대회에서 한국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축구 역사를 쓰고 있다.
한국은 8강전에서 아프리카 강호 세네갈을 맞아 역전에 역전을 주고받는 명승부 끝에 승부차기 3-2 승으로 36년만의 4강 고지를 점령했다. 내친김에 다크호스 에콰도르를 물리치고 결승에 올라 아시아 팀 사상 첫 U20 월드컵 우승까지 넘보고 있다.
많은 네티즌들은 “내 생애 한국이 FIFA 주관 월드컵 대회 결승에 오르는 것을 보게 될줄 몰랐다”고 감격해 하고 있다. 16일 대망의 결승전에서 우크라이나를 꺾고 우승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어느때보다도 크다.
한국축구의 놀랄만한 선전은 크게 3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이강인이라는 천재 플레이메이커를 비롯, 최전방 오세훈과 조영욱, 매경기 수퍼세이브를 펼치는 골키퍼 이광연 등 걸출한 선수들과, 경기흐름에 따른 다채로운 전술로 일약 명장 반열에 오른 정정용 감독, 그리고 그간 축구경기의 고질적 문제였던 오심을 바로잡는 비디오판독 VAR(Video Assistant Referees)의 본격적인 적용 덕분이다.
이강인은 동료들보다 2살이나 어린 만 18세지만 ‘막내 형’이라는 별명을 가질만큼 필드의 지휘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스페인 유소년리그에서 갈고 닦은 기량은 이미 한국 축구선수의 레벨을 넘어선지 오래다. 그는 최고 수준의 유럽과 남미 선수들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고 이들을 능가하는 개인기를 발휘했다. 그가 준결승까지 기록한 4개의 감각적인 어시스트는 세계적인 스타들에 견줄만한 것이었다.
사령탑은 또 어떤가. 정정용 감독은 36년전 무명의 조련사였던 박종환 감독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박종환 감독이 ‘독사’라는 별명으로 불같은 열정의 에너지가 넘쳤다면 정정용 감독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선수들을 완벽한 하나의 팀으로 묶고 있다.
특히 ‘마법의 노트’로 불리는 그의 전술적 자신감은 준결승에서 후반 중반 이강인을 교체아웃 시킨데서도 잘 드러난다. 1-0의 불안한 리드에서 간판스타인 이강인을 뺀다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만일 승부가 뒤집힌다면 감독이 오롯이 책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감독은 과감하게 이강인을 제외하고 스코어를 지키는 축구로 전환했다.
그는 경기후 “득점하면 변형된 포메이션으로 지키려고 했다. 그중 하나가 이강인을 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매경기 풀가동한 이강인의 체력을 안배하고 더 뛸 수 있는 선수로 수비를 두텁게 했다는 대답이다.
어지간한 감독들은 그것이 최적의 판단이라 해도 팀의 간판을 살얼음판 승부에서 빼는 과감성을 보이지 못한다. 그러나 정정용 감독은 전혀 흔들림없이 이강인을 빼는 전술적 변화를 꾀했고 결국 승리의 환희를 만끽할 수 있었다.
전술한대로 한국축구가 선전한 또하나의 비결은 바로 VAR이다. 유럽과 남미 이외의 국가들이 그동안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것은 기본적인 수준차이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도 있었다. 즉 전통적 강호들이 상위권에 올라야 흥행이 되고, 그들의 명예를 지키려는 경기 안팎의 조력이 있다는 뜻이다.
VAR 시스템이 지난해 러시아 월드컵에서 첫 등장할때만 해도 주심이 선별적으로 적용해서 논란이 있었지만 이번 U20 월드컵에선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오심을 최소화함으로써 공정한 승부를 하도록 돕고 있다.
83멕시코청소년대회에서 박종환 감독은 브라질과 준결승전을 회고하며 이런 말을 했다.
“브라질과 4강을 하기 전 아벨란제(브라질 국적의 당시 FIFA 회장)가 격려를 하러 그라운드에 내려왔어. 아니 근데 브라질 선수, 심판하고만 악수를 하고 우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들어가는 거야. 우리를 얼마나 괄시했으면 그런 행동을 해. 회장이란 사람이.”
아벨란제의 행동은 심판진에 결승에 한국이 올라가는 돌발사태가 있어선 안된다는 무언의 압력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당시 축구변방이었던 한국이 경기외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불이익과 설움을 당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VAR시스템은 축구경기의 공정성을 크게 높여줌으로써 향후 언더독들의 반란을 심심찮게 일어나게 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100년 넘게 세계 축구계를 양분해온 유럽과 남미의 기존질서가 무너지는 신호탄이 이번 폴란드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쏘아올려진 셈이다.
그 새로운 역사의 시작은 대한민국이 FIFA 주관 U20 월드컵 대회에서 사상 첫 우승을 차지하는 날이 될 것으로 기대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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