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노보스티 통신 보도
러시아 대사관 직원들과 한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이 7일 탁월한 외교관이며 동방학자였던 세르게이 치르킨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다고 리아노보스티 통신이 7일 전했다. 세르게이 치르킨은 1911년부터 1914년까지 한국 총영사관에서 근무했다.
이 행사에서 안드레이 쿨릭 주한 러시아 대사는 러일전쟁 첫째 날 제물포 항(현재 인천항) 앞바다에서 벌어진 불리한 조건의 해전에서 영웅적으로 전사한 전설적인 ‘바랴그 호’ 러시아 선원들의 유골을 블라디보스톡으로 운구하는 일을 맡아 진행한 치르킨의 특별한 공로(功勞)를 언급했다.
러시아 대사관 측은 이 기념적인 사건이 100주년을 맞이한 2011년부터 치르킨의 묘지를 찾아 추모행사를 가지고 있다. 이전까지는 치르킨의 이름과 공적이 오랫동안 잊혀진 채 묻혀 있었지만, 2011년부터 이 행사는 계속되고 있다.
쿨릭 대사는 “오늘 추모식에 우리 외교관들과 러시아 해외 기관 직원들, 주한 러시아 대사관 부속학교 고등학생들, 한국에 거주하는 러시아 국민들이 참가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항상 조국에 충성했던 재외 동포들을 추모한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증거이다.
세르게이 치르킨의 인생은 양심적이고 전문적으로 외교관의 사명을 다하며 조국을 위해 봉사한 훌륭한 예이다”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1943년 한국에서 영면(永眠)하여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서 추모식을 거행한 후 치르킨의 묘에 헌화했다.
세르게이 치르킨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어려운 시기에 근무했다. 러시아 제국과 조선 왕조의 외교관계는 1884년 우호통상조약 체결로 맺어졌다. 그 다음해 서울에 공식적으로 러시아 공사관이 문을 열었고 1890년에 중심가인 정동에 공사관 자체 건물을 조선 정부로부터 제공받았다.
1896-1897년간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일본인들의 압제를 피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은신한 아관파천이 있었다. 1904년 일본군이 갑작스럽게 제물포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하고 서울을 점령함에 따라 러시아 공사관 직원들은 러일 전쟁 종료까지 조선을 떠나야 했다. 포츠머스 평화조약으로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 보호, 감리권을 승인했지만, 러시아 외교관들에 대해 다른 외국인들과 동일한 지위를 유지하도록 보장받았다.
그 결과 러시아 공사관은 계속해서 업무를 지속했고 1910년 한일합방이 있은 후에는 조선 총독부 지역 공사관으로 기능을 수행했다. 일본은 1917년 10월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외교관들은 공사관 건물 내에서 거주하고 일했다. 여기에 투르케스탄에서 근무하다가 러시아 혁명 후 페르시아에 망명했던 치르킨이 합류했다. 1925년 일본이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함에 따라 공사관 건물이 소련 공사관으로 넘어가고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전할 때까지 기능을 수행했다. 치르킨은 오랫동안 서울에서 러시아어와 외국어를 가르쳤고 외국 외교관들의 존경을 받았지만 일본의 2차대전 패전 이전에 사망했다.
1946년 38선 이남을 통치하던 미군정은 소련 공사관 요원들을 출국시켰다. 2년 후 서울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을 발표했다. 한국전 동안 러시아 공사관 건물은 사실상 완전히 파괴되었고 1973년 복원된 3층 높이의 전망탑은 사적 제253호로 지정되었다. 1990년 9월 30일 대한민국은 소련과 수교(修交)했으며 이후 서울에 다시금 소련 외교관, 그 후에는 러시아 외교관들이 나타났다. 2002년 7월 역사적인 러시아공사관 건물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로운 러시아 대사관 건물이 문을 열었다. 이 러시아 대사관 건물은 소련의 붕괴이후 해외에 건축된 첫 번째 러시아 연방 대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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