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한번 죄수의 나라에서 한솥밥 먹고 서커스 볼까?

 

 

가족은 더 이상 ‘한솥밥’을 먹지 않는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식생활이다. 봉쇄 기간 동안 우버이츠나 메뉴로그 같은 음식 배달앱으로 저마다 시켜 먹는 문화가 똬리를 틀었다. 과거에는 밖에서 음식을 시켜도 온 가족이 모여 의논했다. 각출을 하면 돈을 모아 한꺼번에 결제했다. 가족은 최소한 한 자리에서 먹는 ‘식구’(食口)였다. 지금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각기 해결한다. 자기 전화기 앱으로 주문하고 도착하면 혼자 받는다. 누군가는 양념치킨을 좋아하고 다른 이는 맥도날드 햄버거를 원한다. 서로 취향을 과도하게 존중한다. 심지어 아이들은 따로 시킨 음식을 자기 방에 들어가 유튜브 영상을 보며 먹는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부모들은 굶주린 새끼에게 모이를 주듯 아이를 길렀다. 가족은 굶어도 같이 굶고, 콩 한 쪽도 나눠 먹었다. 집안에서 다른 식구가 있는데 홀로 음식을 먹는 건 있을 수 없었다. 반역이면 반역이고 대역죄라면 대역죄였다. 코로나19를 계기로 사회를 뒤덮은 도도한 ‘혼밥’ 문화가 가정까지 몰려왔다. 겨우 명맥을 이어가던 ‘한솥밥’ 문화를 밀어냈다.

 

가정처럼 작은 집단에서도 문화의 흐름을 되돌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화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집단의 힘이다. 아무리 대세를 이룬 문화도 한번 지나면 그저 회상할 뿐 복원은 거의 불가능하다. 간혹 흔적 없이 사라졌다 느낀 옛 문화가 여전히 살아 있는 경우를 접한다. 그럴 때면 폐허에서 파릇한 새싹을 보는 경이로움에 휩싸인다. 몇 년 전 한국에 갔을 때 고향 영천에서 45년 만에 구경한 ‘동춘 서커스’가 그런 느낌을 선사했다.

호주 시드니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영천에 갔다. 영화관도 없는 소도시라 무료했다. 아버지가 나에게 “동춘 서커스 구경 갈래”라고 물었다. 동춘 서커스라니, 얼마 만에 들어보는 말인가? “그게 아직도 있어요?” 어릴 때 매년 순회공연을 한 동춘 써커스는 아이들에게 꿈과 환상이었다. 강가에 세운 오색 천막 안에서 벌어지는 서커스 공연은 연예인 못지않는 인기를 누렸다. 동춘 써커스를 50대에 다시 본다니. 흑백 과거가 총천연색 현재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70대 아버지와 꼬맹이 아이들과 함께 동춘 서커스를 구경하러 갔다. 허름한 공터에 정말 어릴 때 봤던 색 바랜 오색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앉는 자리가 가마니에서 플라스틱 의자로 바뀐 것 말고는 옛날과 다름이 없었다. 공연을 보는 동안 잠자고 있던 B급 감성이 깨어났다. 공연의 수준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오히려 수준이 낮아 천막 공연장의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었다. 나는 과거의 바람을 만나는 기쁨에 첫 항해에 나서는 돛배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다.

 

문화는 경험을 통해 몸에 새겨진다. 의식하든 않든 있는 듯 없는 듯 내재한다. 동춘 서커스가 그랬다. 한국을 떠나 호주 시드니에서 28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기억한 적이 없다. 그래도 어디 가지 않고 내 안에 나의 일부로 있었다. 따듯한 감성을 머금은 채 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문화는 의식 안에서 암약하다가 계기가 주어지면 실체를 드러낸다. 그 실체는 때로는 동춘 서커스처럼 추억과 감동이고, 때로는 편견과 무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는 호주를 ‘죄수의 나라’로 여긴다.

 

“죄수들이 어떻게 나라를 세워요?”

 

호주를 ‘죄수의 나라’라고 하면 이렇게 반박한다. 영국이 국내에 수용하지 못한 죄수를 식민지 호주로 보낸 건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죄수를 보내려면 당연히 간수도 있어야 한다. 간수는 유형지 호주의 정치 군사 행정 경제 교육 치안을 담당한 국가 조직의 일부이다. 호주를 건국한 주체는 죄수가 아니라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영국의 식민지 조직이다. 정착 초기가 지나면 자유민이 대거 이주했다. 호주가 ‘죄수의 나라’라면 같은 맥락에서 ‘간수의 나라’, ‘군인의 나라’, ‘자유민의 나라’이기도 하다.

 

편견은 게으름과 미움의 결과다. “실제로 그러한가?” 따져 보는 성실이 결핍돼 있다. 진상은 무시하고 상대를 미워하는 열망에 휩싸여 있다. 편견을 진실이라고 믿는 순간 손쉬운 우월감을 가질 수 있다. 죄수가 나라를 세울 수 없다. 편견은 결국 나를 넘어뜨리는 걸림돌이다. 문제의식 없이 살면 문화가 가진 독소에 자신을 잠식당한다. 근거 없이 미워하고, 쓸데없이 비난하고, 엉터리같이 이해한다. 인간은 문화를 소비하지만, 문화 자체는 아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저마다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는 유일한 존재이다. 모든 문화는 개인의 삶 차원에서 다시 새로운 변형을 거친다.

 

“언제 식사 한번 합시다.”

 

예상치 않게 만난 어정쩡한 사이에 흔히 하는 말이다. 나중에 밥을 먹자고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별 일은 아니다. 그저 ‘언제 한번’이라고 때우고 약속 날짜를 잡지는 않는다. 그 뒤로 반년이고 1년이고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또 만나면 전보다 더 큰 미안을 담아 “언제 식사 한번 합시다”하고 헤어지면 그만이다.

 

왜 약속 날짜를 잡지 않을까?

 

먼저 제안하는 사람이 밥값을 낸다는 ‘국룰’ 때문이 아닐까? 상대방이 밥을 사면서까지 만날 가치가 없는 존재라면 빈 말로 그 순간을 모면하면 그만이다. 나나 상대나 똑같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지나면 훌훌 털어버린다. 빈 말을 반복하는 게 지겨웠다. 얄팍한 인간관계가 겉치레만 더해졌다. 내가 뱉는 말에 떳떳하고 싶었다. 비슷한 상황을 만나면 상대에게 ‘언제 한번’을 빼고 특정 날짜와 시간을 넣어 말하려고 애썼다. 이 지점에서 ‘언제 한번’을 둘러싼 문화의 창조스러운 변형이 일어났다. 인간관계의 성격과 범위까지 달라졌다. 실제로 약속을 하고 함께 밥을 먹고 나면 전보다 친해진다. ‘언제 한번’ 같은 의례스러운 인사가 아니라 계획하고 만날 사이가 된다.

 

문화는 집단의 행태를 규정하는 힘이 있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그럼에도 개인은 그 앞에서 전적으로 무력하지 않다. 자신의 삶이라는 작은 줄기 안에서 문화의 지배를 거부하고 다른 선택을 할 자유가 있다.

 

사랑하는 가족은 ‘혼밥’에서 ‘한솥밥’으로 돌아갈 수 있다. 초로의 나이에도 아이들과 ‘동춘 서커스’에 눈물 흘리고 웃음 지을 수 있다. 내가 사는 호주는 ‘죄수의 나라’라는 굴레를 벗고 ‘자유민의 나라’를 노래할 수 있다. ‘언제 한번’의 비겁과 회피를 ‘몇 월 며칠’의 도전과 배려로 바꿀 수 있다.

 

문화는 개인에게는 창조적 투쟁의 장이다. 내 삶 속에서 가장 나다운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단 하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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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철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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