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수교와 미국의 압력
<2> 미국, 이승만에 협정 압력
Newsroh=이재봉 칼럼니스트
3. 한일 수교를 위한 미국의 개입과 압력
한국과 일본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구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반공 정책에 따라 다듬어지기 시작했다. 한일협정은 미국이 1947년부터 소련과 냉전을 벌이면서 추진한 동아시아 지역통합 전략의 일환이었다. 한일협정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양자협상보다는 미국의 중개와 압력에 의해 시작되고 진행된 삼자협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미국이 195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한일수교를 위한 협상을 제안하고 주선(周旋)한 것은 안보와 경제 문제 때문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의 공산권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미일 삼각 공조가 필요했고, 미국의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일본과 분담해야 했다.
1) 이승만 정부 시기 (1948~1960년)
미국은 1945년부터 38선 이남에서 군정을 실시하며 1947년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그 경제를 일본 경제에 결합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아울러 실행되기 시작했다.
미국은 1949년 1월 도쿄에 한국 주일대표부가 개설되고 1949년 4월 한일통상협정이 맺어지도록 이끌었다. 1950년 2월엔 이승만 대통령을 일본으로 초청하고,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10월엔 한국과 일본 사이에 최초의 예비회담이 열리도록 주선했다.
1952년 2월 제1차 한일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한 달 전 이승만 정부가 내놓은 '평화선' 또는 '이승만 라인'이라 불리는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과 재산청구권 문제 등으로 곧 결렬되었다. 이 과정에서 트루먼(Harry Truman) 정부는 미국의 중재를 요청하는 한국보다 미국의 개입을 반대하는 일본을 더 배려(配慮)하여 소극적 개입 자세를 지켰다.
1953년 1월 들어선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북아시아 지역의 집단안보체제 구축을 주요 정책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1953년 1월 이승만을 일본으로 초청한 데 이어 국무부 관리들이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1953년 4월 제2차 한일회담이 열리도록 했다. 두 나라 사이의 이견으로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1953년 10월 열린 제3차 회담 역시 이른바 '구보타(久保田) 망언'으로 결렬되었다. 일본 수석대표 구보타가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며, 일본의 식민통치가 한국인들에게 오히려 이익을 주었다는 내용이었다. 말썽이 일자 오카자키(岡崎) 일본 외무상은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말한 것"이라고 오히려 망언을 거들었다.
이후 미국 국무부 관리들이 4개월 동안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공식적이고 직접적으로 중개에 나섰지만 한일 간의 불신과 갈등을 좁히지 못했다. 미국은 이 과정에서 한일회담의 가장 큰 걸림돌이 이승만의 완고한 반일감정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직접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국무부장관이나 주한미국대사 등 국무부 고위 관리들은 이승만과 회담할 때마다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주문했다.
사실 이승만의 반일감정은 미국의 노력에 걸림돌이 되었고 그의 완고한 성격은 미국의 영향력 행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1954년 7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Allen Dulles) 국무부장관이 한일협정을 강요하다시피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반발함으로써 회담이 결렬되기도 했다.
덜레스가 한미 정상회담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한일 관계정상화에 있다며 한국의 안전보장과 경제발전을 위해 반일정책을 포기하라고 하자, 이승만은 변함없이 한국을 식민지처럼 간주(看做)하는 일본을 비난하며 반발했다. 아이젠하워가 이승만의 완고한 태도에 불만을 드러내며 퇴장한 데 이어, 곧 재개된 회담에서는 이승만이 도중에 퇴장해버린 것이다.
한편, 한국전쟁을 통해 재정적자가 심각해진 미국은 1950년대 중반부터 국방비 감축 및 대외원조 축소 등을 통해 정부 지출을 줄이고자 했다. 그 무렵 미국이 가장 많은 원조를 제공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한국이었는데. 1950년대 중반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 및 군사 지원 액수는 1년 평균 10억 달러 안팎이었다.
이 상황에서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가 한일관계 개선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수교하면 일본이 미국 대신 한국에 원조할 수 있고 한미일 삼국조약(tripartite treaty)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줄이기 위한 방안의 하나는 주한미군의 핵무기 배치였다. 1950년대 중반 북한 병력은 약 35만 명이었는데 남한 병력은 두 배가 넘는 72만 명이었다. 남한은 미국의 원조로 거대한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미국이 재정 적자를 줄이려면 남한 병력을 감축해야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 재정의 70% 이상을 국방비로 쓰면서도 무력 북진통일을 이룰 때까지 병력을 조금도 감축할 수 없다며 미국의 계획에 거세게 반발했다. 이승만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며 남한 병력을 감축함으로써 미국의 군사 지원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 핵무기를 비롯한 주한미군 장비의 현대화였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58년 1월부터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하고 1959년부터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 원조를 급격히 줄이면서 이승만을 더욱 압박했다. 그래도 이승만은 여전히 한일협상을 완강하게 거부하며 비타협적 자세를 취했다.
이승만 정부는 '평화선' 또는 '이승만 라인'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을 격침하거나 나포하고 어부들을 구속했다. 일본은 이에 맞서 1956년부터 재일동포를 조선 (북한)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자 미국은 1959년 5월 '평화선'에 항의하는 각서를 한국 정부에 전달했다. 나아가 1960년부터 한일협정을 위한 압력을 서울과 도쿄 그리고 워싱턴에서 입체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로 학생데모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미국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선거"에 대해 경고하며 이승만 정부의 이러한 약점을 한일협정을 위한 압력 수단으로 이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영해(領海)를 침범한 일본 어부들을 구속하고 일본과의 무역을 단절하는 등 "일본에 대한 한국의 비현실적 대외정책"은 미국의 요구대로 바뀌지 않았다.
이승만은 주한 미국대사에게 국무부 각서가 "진실과 매우 동떨어진 것"이고, 국무부장관이나 관리들이 동북아시아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는 데다 한국인들보다 일본인들을 더 신임하는 등 너무 친일적이라고 비판하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래도 미국의 지속적인 압력에 따라 3월 18일 한일회담 재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4월 초 양국 간에 무역이 재개되었으며, 4월 15일에는 한일회담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4월 27일 이승만의 하야(下野)로 중단되고 말았다.
2) 허정 과도정부 및 장면 내각 시기 (1960~1961년)
이승만이 1960년 4월혁명으로 물러나자 미국의 압력은 더욱 다양해지고 강해졌다. 국무부는 주한 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허정 과도정부 수반에게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꾀하고 미국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주문했다.
마침 허정은 1959년 8월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는데 미국은 일본에 대한 그의 협상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던 터였다. 그는 한일관계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며 자신이 두 나라의 국교정상화에 '특별히' 힘쓸 테니 미국은 일본정부의 재일동포 북송을 막는 데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매카노기(Walter McConaughy) 주한 미국대사의 "충고와 도움"에 따라 1960년 5월 3일 과도정부 '5대 시책'을 발표했는데, 첫째가 "반공주의 정책을 더욱 견실하게 추진한다"는 것이고, 다섯째가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었다.
이 무렵 도쿄의 매카써(Douglas MacArthur) 주일 미국대사는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은 한국의 새 정부를 이용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1960년 7.29 총선을 통해 들어선 장면 정부 역시 미국의 요구에 따라 일본과 "새롭고 적극적인 교섭"을 시도했다. 그러나 1961년 5.16 쿠데타에 의해 중단되고 말았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이재봉의 평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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