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불중견작가 곽수영 화백의 개인전이 11월18일부터 12월23일까지 galerie phd에서 열린다.
인상주의나 흐릿한 점묘화법의 회화 작품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업은 멀리서 보면 수많은 작은 선들, 점과 터치들을 통하여 어두움, 실루엣, 사람과 동물, 상상의 풍경들의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선명함보다는 흐릿함,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채색된 몽롱함들이 나타나는 작품들이다.
작품앞으로 다가서면 캔버스 표면은 말라오그라든 작은 조각들, 물감의 부스러기들, 그림에서 떨어져 나온 거친가루들로 뒤덮여 있다. 무엇보다도 빛의 방향이 잘 비춰질 때와 우리가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측면에서 바라볼 때 작품의 ‘깊이감’을 발견하게 된다.
곽수영의 회화작품은 마치 조각으로 인식되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캔버스위에 모티브, 선, 윤곽들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 내면 깊은 곳에서 창조된 조각의 잔유물들로 실재가 만들어짐을 알아차리면 우리는 더욱 놀라게 된다.
어떤 주제가 아닌 리듬과 색으로 표현하는 작가를 소개하려면, 그의 작품을 주의 깊게 들여다 볼만한 이유가 주어져야 한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굳이 곽수영을 다른 한국 화가 예컨대 내가 파리에서 알고 있는 이응로 -그의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와 연결시키지 않겠다. 그런 관계를 찾는다면, 기껏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지구 저편의 예술에 대해 전문가인양 하는 일 밖에 안 될 터이지 않는가 ? 그런데 실상 나는 어떤 예술에 대해서건 특별한 전문가로 자처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프랑스인들은 재불 한인 작가들을 많은 관심 속에서 맞이한다. 그들은 모국을 떠나 외지에서 작업하고 있거니와, 그 가운데서 새로운 정보를 찾고 자신의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변화 》란 작가가 자신의 진면목에 더 가까이 다가서려는 의도에서 꾀하는 변모를 뜻한다. 실상 작업의 성질은 끈임 없이 변화될 수 있다. 마치 우리 존재의 전체 모습이 그대로이면서 신체 세포들은 끈임 없이 새롭게 바뀌어지는 이치와도 같다.
곽수영과 이응로의 작품에서 민족적 예술성을 간파해내는 것은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아마도 숙달된 눈으로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그들의 공통된 원천을 분간해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어떤 단체나 그룹, 전반적 경향을 개괄하려 하지 않고, 개별 작가를 평하는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곽수영은 단연코 주목할 특이한 작가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이 이곳 파리에서 제작됐음은 우리에게는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작품들을 대할 때, 사람들은 흔히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분간하거나 식별해내고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요컨대 그들은 단순히 주시하는 일을 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나 곽수영은 제목에 비추어 요약돼 버리고 마는 작품을 하는 작가가 아니다. 우선 그의 캔버스 위에는 식별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거의 아무것도 없다. 잠시 후 우리는 그런 작품 표면에서 떠오르는 여인이라든가 어린아이, 말들, 사람의 무리들 등을 분간해내며, 작가는 거기에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제목을 부여한다. 실제로 그의 회화는 무엇도 분명하게 가리키고 있지 않다. 부스러기와 가루들, 미세한 물감 덩이들 그리고 실낱 같은 선들이 서로 뒤엉켜 있을 뿐, 그나마 그런 뒤엉킴 조차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그의 작품의 형태들은 비물질적인 몽환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은 극단의 영역 또는 한계에 부닥치고 만다. 감상자로서는 간파해내기 어려운 위기의 상태라고나 할까 ?
아마도 작가는 우리가 그의 작품 앞에서 갖는, 설명하고자 하는 유혹을 피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곽수영이 제시하는 형태들은 우리가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지나가 버리고 만다. 보았다고 확신할 수 없으므로, 그의 형태들은 의심스러운 불분명한 기억 속에 머문다. 구체적 현실성이 가능한 최대로 소거된 상태라고나 할까? 그러나 반대로 그의 작품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분명, 인체나 동물의 해부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진 않지만, 그의 형태들은 생명으로 가득 차 있다. 여인이나 어린아이의 생명력이 아니라, 다른 화가들 작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작가의 작업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생명력이다. 하지만 곽수영의 작품은 그 생명력을 구구하게 드러내 보이거나 강조하여 환기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생명감은 부재(不在)의 영역 한 켠에서 솟아나고 있다. 어떻게? 실상 우리 모두는 삶의 한 가운데서 이런 부재를 체험하지 않던가 ? 예컨대 기억이라는 의식의 형태로 말이다.
나는 그의 작품을 아주 우연히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밋 아래 전시장들에서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그의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부재(不在)감이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 강조된 존재감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아있는 사실에 대해 숙고해 볼 여유를 갖지 못했었다.
어느 작품과 마주치게 되든 간에, 나는 항상 작가가 작품 속에서 추구하는 바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1947년, 페르낭 레제의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도 그랬고, 장 팅글리의 시골 작업장과 몽빠르나스에 있던 이브 클랭의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도 그러했다. 그들과 만나면서 나는 항상 몽매한 상태를 벗어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했고, 그들의 작품에서 — 특히 페르낭 레제의 경우 — 너무 성급하게 작품 파악을 하기 보다, 마치 길을 걷는 보행자가 거리의 흐름과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듯, 시간의 여유를 갖고 작품의 이모저모를 바라보며 숙고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 덕분에 나는 장 팅글리의 기계작품이 만들어내는 불규칙의 리듬이 죽음의 개념이 아닌 《 에스프리 》로 통하며, 이브 클랭의 《 청색 》이 비가시성으로 통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중략)
-Pierre DESCARGUES-
LE VISIBLE ET L'INVISIBLE
SooYoung KWAK
기간 : 2016년 11월18일 ~ 12월23일
오프닝 : 2016년 11월 18일(금) 18h à 21h
장소 : galerie phd
12, Avenue de Champaubert 75015 Paris
【한위클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