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좋은 금요일 오후, 오천룡 화백의 아뜰리에를 찾았다.
파리 15구 에밀졸라에서 멀지 않은 조용한 주택가 아파트 맨 꼭대기 층에 그의 작업실이 자리잡고 있었다.
에펠탑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파리의 조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 멋진 아뜰리에 에서만 40여년 넘게 작업해 온 터여서 구석구석에 그의 혼과 숨결이 가득 배어 있었다.
뜨거운 예술의 열정을 찾아 파리로 날아와 둥지를 튼 것이 1971년 이었으니까, 벌써 53년째 그림을 향한 집념과 고집만으로 외길인생을 걸어 온 셈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영혼은 자유로운 세계를 갈망하던 젊은 시절, 청년의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 오 화백님의 성장 배경과 프랑스에 오시게된 동기가 궁금합니다.
서울에서 해방 전인 1941년에 태어났는데,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태극기 흔드는 모습에 대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6.25사변이 발발해 전쟁의 참사 속에서 죽은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서울 일신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부터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요. 고등학교 때 4.19혁명을 겪고 미술대학에 들어가자마자 5.16혁명을 겪고 치열한 데모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태어나서 청년기까지 불안과 공포, 굶주림의 전쟁, 혁명기와 독재체재를 겪은 사납디 사나운 팔자를 지닌 세대였습니다.
그런데 내 핏줄에 흐르는 그림 그리는 재주가 있었던지,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보다 그림 그리는데 더 열중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미대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떠날 작정을 했으나 2대독자였던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졌고 만30살이 되는 해 여름, 처자를 두고 꿈에 그리던 파리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김포를 떠나 오를리에 도착하자 스스로 다짐하기를 나는 결코 돌아가지 않겠다는 거였습니다. 루마니아 부카레스트에서 태어난 브랑쿠지가 고향으로는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결심을 굳히려고 편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미술학교를 다니던 뮌헨에서 파리까지 두 달 동안 발로 걷고 걸어서 왔던 것처럼 말이죠.
▶ 당시에는 유학이 어려웠던 시절인데...
1971년 8월 어렵고 어렵게 6개월 한정 여권을 받았습니다. 여행자 여권발급이 없던 시절이었고 국비장학생초청을 받아야 프랑스엔 갈 수 있었는데, 어떻게 알아보니 6개월간 연구목적으로 외국에 나갈 수 있다는 단기 여권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정부 주관의 국비장학생 선발시험을 통과하려면 불어를 썩 잘해야 경쟁을 뚫을 수 있었는데, 그만큼의 불어실력이 안돼 몇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일단, 파리 그랑드쇼미에르 미술연구소에서 발부받은 1개월짜리 수강 영수증으로 여권을 신청해 가까스로 여권을 손에 쥐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여행은 무일푼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돈없이 어떻게 떠나야하는 건지 이해가 안되는 사항이었지만 여권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기뻤고 여행가방 끈의 실밥을 뜯고 그 속에 꼬깃꼬깃 접은 달라 몇 장을 몰래 숨겨가지고 나왔습니다.
파리에 오니 살길이 막막한 채 하루하루가 모험이었습니다. 다행이랄까 내가 파리로 떠났다고 하니까 물고기가 물을 만나게 됐다고, 외국에 먼저 나가있던 친구들이 좋아했고 나를 도와주기 시작했지요. 중-고등학교 친구들은 오천룡하면 그림그리는, 파리에 가서 그림 그려야하는, 그래야 성공할 수 있는 친구로 생각해주고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유학중인 한 친구가 한국으로 정기적으로 송금하는 재독한인에게 부탁하여 그 일부를 나에게 보내주고 나는 그만큼을 한국에서 갚아주는 식으로 하는 생활비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 미대 졸업후 교직에도 계신 것으로 아는데...
미술대학을 졸업하자 작가는 다른 직업을 병행해서 함께 할 수 없다는, 전업화가로만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아주 강했지요. 화가가 또 하나의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은 학교 미술선생 직인데 나는 그것을 거부했지요. 그렇게 버티며 개인전도 열고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고자 했으나 결국엔 중학교 선생을 택하여 정기적으로 봉급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를 아끼시던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우연히 마주친 자리에서 너 오천룡, 학교선생 쭉 할꺼야라며 질책하셨습니다. 그 선생님은 내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셨는데 나의 재주를 보고 그때는 어림도 없었던 미술도구인 유화재료 일체를 어느 학부형에게 부탁하여 마련해 주셨지요. 그 도움을 준 학부모가 누구인지는 네가 성공한 다음에 말해주겠다 하셨지만 내가 프랑스에 온지 얼마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선생님은 내가 다른 길로 벗어나려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내내 지켜주신 은사님 이십니다.
▶ 파리 유학시절을 회고하신다면.
아! 꿈에 그리던 그 파리였습니다. 누군가 넌 파리에 왜 왔는가 물어오면 나는 주저없이 “서양화가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 목격하러왔다.”라고 했습니다. 대학시절에도, 일본에 가서 간접적으로 서양화를 공부한 교수들에게서만 미술을 배웠기 때문에 내 눈으로 직접 서양미술이 무엇인지 꼭 알고 싶었습니다. 그랑드쇼미에르를 거쳐 파리국립고등미술학교를 정식학생신분과 청강생으로 4년동안 다니면서도 나의 다음 목적지는 이태리에 가서 서양미술의 태동을 처음부터 확인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뛰어간 곳이 지옷또 벽화성당이 있는 파두바였으며 다음엔 이태리 미술사의 자취를 구석구석 뒤지며 다녔습니다. 그다음은 북쪽으로 향하여 렘브란트와 프랑다스의 화가들의 자취를 좇아 다녔습니다. 이렇게 유럽전체를 돌아다니는 그야말로 화가의 순례길을 걸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즉 내 눈으로 확인하기위해서였지요.
▶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해...
어려서 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나는 미술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구상화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60년대 우리나라에서 서양미술을 하는 작가들은 유럽과 미국에 있는 현대미술의 흐름에 어떻게든 젖어 들고자 했을 때였지만 그 경향을 감지한다는 것이 겨우 해외뉴스나 간혹 볼 수 있는 외국 미술잡지를 통한 막연한 짐작이었지요. 나는 그런 짐작에서의 간접적 방향으로 향하기를 몹시 꺼리며 주저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예술가가 개성을 찾는 창작행위라기 보다는 남이 하는 유행된 경향을 그대로 복사해 자기 것으로 작업하려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죠. 사실 우리 학교의 미술학도들조차도 무조건 따라 해보기에 급급했어요.
졸업 후, 나도 현대작가들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추상 내지 비구상적 화풍에 뛰어들었고, 그것으로 두 번의 개인전을 열어 한국화단에 데뷔해 1971년 파리로 떠날 때까지 그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 작업은 다름 아닌 나름대로의 묘한 서정적인 추상세계이긴 했습니다.
파리에 도착하자 나는 나를 제로 상태로 돌려놓고 새로이 출발하자고 스스로 결정 했습니다. 파리미술학교에 들어가 인체모델교실에서 뎃생과 크로키를 시작하고 다시금 구상화 작업으로 내 작품의 스타일을 바꿔나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나의 그림에서 색채들이 너무 많이 등장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야말로 강렬한 색채들이 서로 얽히고 설켜 혼돈된 상태였습니다. 그 혼돈된 상태에 질서를 주는 방법이 필요했는데. 그러나 그 방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화가들은 작품의 주제들을 자기들만의 고유한 윤곽으로 형태를 고정해 놓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폴 세잔느의 윤곽이 서로 생판 다르듯이 마티스와 폴리아코프의 윤곽도 서로 사뭇 달랐습니다. 모든 작가가 그렇듯이 나도 나만의 윤곽을 정하리라 마음먹었지요. 내 생각에 화가들의 그 중요한 형태의 문제 풀이는 윤곽처리를 얼마나 독특하게 이루었는가?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1984년 우연히 발견한 나의 윤곽은 하나의 선이 아니고 세 겹선인데 두 개의 흰 선속에 하나의 검정선이 들어있게 한 선입니다.
나는 화면의 모든 형태들과 모든 색면을 이런 나의 세 겹선 윤곽으로 둘러쳐 각자가 뚜렷이 독립되게 보이도록 의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마티스가 지적한데로, 하나의 형태와 하나의 색면이 가지는 절대가치는 이웃한 형태와 이웃한 색면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색인가에 따라 좌우된다는 그의 가르침에 적극적으로 따르려는 작업이 나의 목적이 됐습니다.
젊었을 때 나는 색채를 매우 좋아했었는데, 그래서 서양화를 선택한 것이지만, 지금은 색보다는 선에 더 관심이 가는 중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나이가 들어서 나의 뿌리가 한국인으로서, 어렸을 때 접했던 동양화 기법에 대한 동경이 더 강해진 까닭인 것 같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동양화는 물, 붓질과 먹이 이룬 검은 선, 그것과 흰 여백의 예술이고 서양화는 오일, 색소가 이룬 명암에 의한, 흰 여백 없는 예술이라고 하는 반복된 기억 속에서 나의 작품세계는 겉으로 보여지는 시대적 피상적 경향의 흐름과는 상관없는,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토대로 여기기 시작한 회화의 3요소 “선-색-여백”을 향한 내면의 방향으로 천천히 바꿨고 또 바뀌고 있습니다.
▶ 프랑스에서의 작품활동이 어떠한 장점을 주는지요?
프랑스 도착이 1971년이니까 벌써 43년 됐습니다. 도불 후 작업들은 현재의 경향을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웃사이더라고나 할까요? 꼭 집어서 어떻다하는 화풍을 지니지는 않았습니다. 첫째도 둘째도 남의 간섭이 없어야했습니다. 이것은 어려서부터의 내 고집이며 작업방침이었지요. 이런 자유스러운 작업을 하는데 이곳 파리가 나에겐 아주 적절한 장소였습니다.
하도 나만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니까 미국에 있는 친구가 마음고생 그만하고 미국으로 오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파리미술학교에 다닐 때 교수들이 미술운동에 있어 혁명을 일으킨 인상주의화가들의 작품 90% 이상이 미술운동을 먼저 인정한 사람들이 있는 미국에 있다며 미국에 가서 살피고 오라고 했었습니다.
때문에 1980년 뉴욕에 전시회 하러 가서 석 달을 머무는 동안에도 파리의 그랑드쇼미에르 격인 아트스튜던트 리그에 다니며 미국풍을 알아보려고 했고, 그 후 여행도 여러번 해보았으나 내가 자리할 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매번 들었습니다.
나는 유럽을 너무도 좋아하고 파리를 너무도 좋아합니다. 파리에서의 작품 활동이 어떤 장점이 있는지는 작가들이 각자의 자기 방향이 어느 쪽을 향할 것인지에 모두 다를 것이다 생각합니다.
▶ 작품활동 외에 특별한 여가활동은? 또는 작가들에게 추천하고 픈 여가활동이 있다면...
작품활동은 작업실에만 콕 박혀 있다고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미술학원에 가서 먼저 무엇을 배우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그보다는 책을 많이 읽게 하여 인류들이 남긴 업적인 고전세계를 익혀 조형적이지 않는 생각의 폭을 넓혀주는 쪽이 좋습니다. 화가는 손재주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새롭게 표현하느냐하는 창조적 방향에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독서습관이나 경험보다는, 석학들이 다 정리해 놓은 원칙인 미학과 철학을 배우고 추구해서 거기에 따라다니는 작업으로 창작하려는 것인 개념미술에 반대합니다. 예술은 기존해 있는 개념이 먼저가 아닌, 영감에 의한 창작이고 그 창작으로 부터 없었던 새로운 개념이 탄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고전음악과 오페라감상입니다. 그것도 집에서 기계에 의해 혼자 듣고 좋아 하는게 아니고 연주장과 오페라극장을 찾아가 현장에서 듣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독서입니다. 독서는 인생을 풍부히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줍니다. 세번째는 장거리 걷기(randonnées)입니다. 걸으면서 온갖 잡념을 없앨 수 있었습니다.
▶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젊은 미술작가들에게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신다면...
많은 작가들이 프랑스에 와 있으면서도 프랑스를 깊이 있게 알려고 하지 않고, 습관과 사고방식을 고국의 것 그대로 유지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프랑스에 있는 한 프랑스의 예술 문화 역사를 완전히 혹은 더 많이 알기위해 애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 고국에 대한 이익이며 작가들의 장래가 되는 역할을 하게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파리에 온 화가들은 고전을 실컷 보고 배울 수 있는 미술관 때문이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모든 화가들이 맨 먼저 간 곳은 루브르 입니다. 거기에서 본 고전에서 자신의 개성을 완성시켜야하는 새로운 길을 찾을 때까지 여러번 가고 또 갔습니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은 루브르에 모르긴 몰라도 가지 않습니다. 작가들은 루브르에는 관심이 없고 베니스비엔나레나 바젤미술시장에 가려고 합니다. 나는 작가들에게 거기에는 왜 가느냐고 말렸습니다. 작가들은 현재의 미술 경향을 알아야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합니다. 그 경향을 알아서 무엇합니까? 거기에 가서 본 새로운 경향의 화풍은 이미 그 작가들이 숨어서 몇년 몇십년 동안 작업해 내 놓는 것일진데, 그것은 그 작가들보다 몇년 몇십년 뒤떨어져 따라가려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결국 뒤떨어져 항상 다른 사람들의 경향만 좇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찾고 쉽다면, 먼저 루브르에 가서 찾으세요.
또한 파리에서는 몇 년 몇 십 년 동안 기획해 준비하는 옛날 작가들의 회고전을 열기 때문에 이곳을 찾아 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이런 회고전은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데 그것이 옛날 것이라고 외면하기 일수 입니다. 옛 것을 뒤져내어 전시로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뒷받침된 회고전을 남모르게 자세히 관찰한다는 것은 작업의 길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 정헌메세나 청년작가상을 제정해 10년동안 꾸준히 이어 오셨는데, 시작하게 된 동기는...
나의 중학교 동창 친구 서민석(동일방직회장)은 파리에 오면 꼭 나를 만나고 가곤했습니다. 그는 공대출신이고 사업가이기 때문에 방향이 전혀 다른, 나 같은 예술가를 가까이하고 싶어 했습니다. 1999년 말 쯤에 나에게 이렇게 물어왔습니다. 선친이 돌아가시면서 회사에서 벌어들인 돈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하셨답니다. 대를 이어 회장이 된 서민석은 곧 아버지의 호를 따서 1979년 정헌재단을 만들었고 재단은 섬유계통의 일에서의 연구자, 섬유과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지급해 왔습니다. 그는 목화밭이 많은 곳, 카이로대학의 섬유과 학생들에게도 장학금을 주고 있습니다. 재단역사가 20년이 지난 후 서민석 회장은 재단이 학술재단으로부터 사업을 예술분야까지로 넓히고 싶은데 미술분야에서 무엇을 하면 좋을까? 물었습니다.
예술분야까지 넓히려는 문화사업을 한다면, 대부분은 유명작가의 가치있는 작품을 사 모으고 수집품을 쌓아 회사에서 그 수집품으로 미술관을 개관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나는 반대하겠다며 내가 오래전부터 생각해 오던 지금의 정헌메세나 협회의 운영방식을 제안했습니다.
서회장은 몇 년을 더 상의해보더니 나의 제안에 응하며 협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 앞으로의 계획이나 작가로서의 큰 비젼이 있다면?
내가 추구하고 있는 선-색-여백의 작품세계를 더 추구합니다. 더 추구하지만 완성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작가는 완성할 수 없을 그 무엇인가에 대한 완성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후세를 잇는 작가들을 향해서 풀지 못한 어떤 미지의 숙제를 남길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카소는 세잔느가 남긴 미지의 숙제를 풀려는 일을 했던 것 같이 나는 마티스가 남긴 숙제를 지금 나의 숙제로 삼은 선-색-여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