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코리아위클리) 홍병식(내셔널유니버시티 교수) = 노인들 중에는 “빨리 죽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가끔 보게됩니다.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이 한인들이 자주말하는 3대 거짓말 중의 하나라고 하지만 그런 말이 진정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나오는 노인들이 계실 것입니다.
자녀들로부터 푸대접을 받으시는 노인들은 외롭고 섭섭한 눈물을 흘리십니다. 친자녀들이 노부모를 섭섭하게 대하거나 귀찮은 부담으로 여기는 것도 노부모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만 자녀의 배우자들이 노골적으로 노 시부모를 눈의 가시처럼 여기면 정말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이 절로 나올 것입니다. 정부에서 지불해주는 보조금으로 생활을 하시는 노인들은 그런대로 어느 정도의 자긍심을 유지할 수가 있겠지만 자식들의 부양을 받는 노인들은 용돈을 기대하기 조차 자존심이 상하는데 용돈을 주는 자식이 언짢은 태도를 보이면 오래 사시는 것 자체가 싫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정에 처한 노인들의 처지를 직접 간접으로 알게될 때마다 노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한탄을 하시는 노부님들에게 자식 이외의 어떤 위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에서 노모를 모시지 않겠다고 다투던 형제가 노모를 길에 버렸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노모의 말씀은 그런 보도를 읽는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습니다. “자식들에게 무슨 허물이 있겠습니까? 오래 살고 있는 나의 죄이지요.”고 말씀을 하신 그 노모는 역시 무조건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위하는 어머님의 마음을 잘 반영했습니다.
어머님을 길가에 버린 아들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자기네들은 영원히 젊음을 유지할 것으로 생각하는지? 자기들이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을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는지? 지금 괜찮게 살고 있겠지만 세상의 부와 재산은 몹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백만 장자도 한 두번의 실수로 알거지가 된 사례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물어보고 싶어집니다.
저는 감동을 주는 고부 관계를 들었습니다. 88세의 시어머님과 50대 중반의 며느리 사이에 10여년간 유지되는 아름다운 관계에 관한 야기이었습니다. 3000마일의 거리를 두고 살고 있는 노모님은 맞 며느리와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왕래도 소식의 교환도 끊겼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가 손자녀들도 만나볼 기회를 주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기회 있을 때마다 “빨리 죽고 싶다” 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의 화목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드디어는 이혼이라는 파국을 맞게 되었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새로 들어 온 막내 며느리는 극과 극의 차이를 보였습니다. 그 며느리가 들어 온지 10여년 동안 새 며느리는 매달 한번도 빼 놓지 않고 시 어머님께 새 지폐로 송금을 해드렸는데 돈봉투에는 꼭 어머님에게 위로와 사랑을 표현하는 편지를 동봉했다고 합니다. 송금을 한 며느리는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시느냐고 묻지도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자주 “빨리 죽고 싶다”고 하시던 그 모님은 이제 “살맛 난다”고 자주 말씀하신다고 합니다. 오직 하나 있는 유감은 그런 즐거운 대접을 자식들한데 자기 처럼 받아보지 않고 먼저 타계하신 남편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리신다고 했습니다.
이런 새 막내 며느리의 헌신적인 극진한 노모 존중은 노모의 근처에 사는 손위 형제들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끼쳐서 지금은 온 가족이 웃음꽃을 피우는 회목한 가족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가족이나 어떤 단체라고 하더라도 한 두 사람의 정성과 노력으로 전체적인 분위기를 변경시킬수 있습니다. 노부모님께 드리는 금품이 많다고 하더라도 정성 없이 주는 금품은 받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하지 않습니다. 마지 못해 드리는 금품은 오히려 노부모의 심사를 상하게 합니다. 부모를 위하는 정성은 그분들에게 드리는 금품의 양으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전에도 제 칼럼으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부모님이 작고하신 후에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는 것 또는 제사를 대대적으로 지내드리는 것보다 부모님께서 생존하실 때 따뜻한 식사 한 끼라도 정성 껏 해드리고 사랑한다는 성의를 보이는 것이 부모님을 즐겁게 해드리는 효도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