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가의 섬, 민족 수난의 섬 거문도 (3)
2차 조국순례 이야기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나는 영국군 묘지공원에서 바다로 향하는 가파른 길을 내려와 서도로 가는 삼호교를 향해 걸었다. 해변 길에는 해저케이블 종착점과 쓰레기 처리장이 있었다. 삼호교로 가는 입구에는 일제 때 건립한 ‘거문도항 수축(修築)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일본 소화(昭和) 연호가 그대로 새겨진 기념비에 따르면 당시 동방파제 130미터 서방파제 110미터 매축 4020 평방미터의 거문도항은 소화 11년 10월 기공하여 공사비 19만7천엔을 투입해 소화 13년 11월 준공했다고 새겨져 있다. 나는 아직까지 일제 연호가 그대로 남아있는 기념비의 생소함보다는 일제의 거문도항 수축 목적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소화 11년은 1936년으로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1년 전으로 거문도항을 전쟁물자 수송에 이용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사실 거문도는 천혜의 항구지만 해군기지로 사용하기에는 규모가 작다. 따라서 해군기지보다는 전쟁물자 수송항으로 적합했을 것이다. 영국함대도 해상 교통의 요충지인 거문도를 중간 기항지와 해안포 기지로만 이용했다. 영국함대가 철수한 뒤로는 일본이 어업기지로 활용했다. 그러나 거문도는 영국이 점거할 만큼 해상의 요충지이다. 따라서 등대도 남해안에서는 처음으로 1905년 설치되었다. 나는 서도의 등대를 찾아 삼호교를 건넜다.
등대로 향하는 해변 길은 황금빛 모래로 아름답고 수심이 깊지 않고 수온이 따뜻해 해수욕장으로 최적인 유림해변을 지난다. 유림해수욕장에서 보는 거문도의 경관은 평화스럽다. 보로봉을 곁에 두고 안노루섬과 밖노루섬이 모두 보이는 곳에 위치해 풍광(風光)이 아름답다. 여름철 가족단위 피서객들에게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해변을 걷다보니 언덕 위에 생뚱맞게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일명 천정궁 호텔이라는 거문도 섬호텔이다. 거문도에 웬 관광호텔이냐는 의문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통일교다. 통일교 산하 일상해양 산업은 2011년 9월 문선명 부부와 1500명의 미국 일본 한국의 통일교신자와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천정궁 호텔 봉헌식’을 거행했다. 종교라기보다는 재벌기업에 가까운 통일교는 창시자 고 문선명 뜻에 따라 앞으로 여수일대 해양관광사업이 유망할 것이라는 판단으로 공사비 4백억 원으로 지하 1층과 지상 3층 호텔과 지하 1층과 지상 1층의 연회동으로 백악관을 본 따 지은 것이다. 객실과 세미나실 레스토랑 연수시설까지 갖춘 호텔은 거문도의 유일한 고층빌딩이다. 가을철 관광객이 없는 탓일까. 웅장한 호텔건물은 적막(寂寞)에 쌓인 채 유령의 건물처럼 보였다. 나는 국립공원 다도해 해양관리소 건물을 옆에 끼고 등대길 도로를 걸었다. 등대로 가는 길은 유림 해수욕장에서 목넘어재와 보로봉 신선바위로 이어지는 동백숲이 아름다웠다. 서도와 등대가 있는 수월산은 한 개 섬이지만 목넘어재라는 별로 길지도 넓지도 않은 갯바위들로 연결된 사실상 별개의 섬이다. 파도가 세면 바닷물이 바위를 넘는다고 해서 목넘어재라고 부른다.
수월산 넘어 등대로 가는 길은 대낮에도 컴컴할 정도로 숲이 울창했다. 거문도 등대는 1905년 불을 밝혔다. 1903년 가설된 팔미도에 이어 112년이나 된 남해안 최초의 등대이다. 지금은 옛 등대 옆에 2006년 건설된 현대식 등대가 가동한다. 15초에 한 번 씩 섬광하는 등대 불빛은 42킬로 밖에서도 볼 수 있다. 등대 옆에 관백정(觀白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백도는 물론 멀리 한라산까지도 희미하게 볼 수 있다. 나는 관백정에 걸터앉아 130년 전 영국군이 왜 이곳을 점령했을까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해 보았다.
사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오래전부터 노리고 있었다. 거문도 점령 40년 전인 1845년 영국은 사마랑함 선대 에드워드 벌처 제독에게 거문도 조사를 명했다. 이에 벌처 제독은 거문도 일대를 샅샅이 조사했고 거문도항에 정박해 주민들 성향까지 파악했다. 물론 영국은 이 같은 정탐행위를 조선에 통보하지 않았다. 영국해군 기록에 의한 사실이다. 영국은 조사 후 섬 이름을 당시 해군성장관 조지 해밀턴의 이름을 따 포트 해밀턴으로 명명했다. 이때 영국은 거문도 점령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40년 뒤 실제 거문도를 강점한 것이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오래전부터 착착 준비되어 왔다. 1877년 홍콩주둔 영국해군 중국본부장 라이더 제독은 “러시아를 견제하고 중국과 일본을 상대로 하는 무역을 보호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1884년 12월 영국군은 메를린함 선장 레지날드 캐리-브랜톤 대위에게 거문도를 다시 상세하게 조사했다. 당시 보고서에는 거문도의 지리적 개요 뿐 아니라 주민들 성향까지도 기록했다. 보고서는 “거문도에 사는 수백 명(조선기록은 2000여명)의 어부와 농부들은 아무런 정치적 견해도 갖고 있지 않고 조용하고 평화롭게 생선을 잡고 쌀로 밥을 지으며 살 수만 있다면 우리가 점령해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 현실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아 왔다. 중국 몽고 일본은 물론 근세기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까지 가세했다. 자체적 방어력도 없고 백성들이 정부에 등을 돌릴 경우 거문도에서 보는 것처럼 언제든지 강대국의 속국이 될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지금도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눈치를 살피며 사는 처지다. 국력은 민심을 얻는데서 생긴다. 불공평하고 부정부패가 판치면 민심은 떠나게 마련이다. 우리가 거문도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평화롭기만 한 오늘의 거문도를 바라보면서 발길을 되돌려 민박집으로 향했다. 내일은 또 발 길 닫는 대로 떠날 것이다.
<계속>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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