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서울=코리아위클리) 최태선 목사(하늘밭교회) = 목사가 되기 전부터 나는 좋은 교회들을 찾아 수요예배를 드렸다. 목사가 된 후에는 그런 교회들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내 딴에는 신경을 써서 그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에 따라 그에 적합한 글을 썼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 글들은 얼마 안 가 모두 삭제되었다. 길어봤자 5개 정도가 올라가면 모두 삭제되었다. 물론 글을 올리기 전에 내 소개를 하고 교제의 손길임을 밝혔다.
또 바르게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에게도 교제의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답신을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보낸 메일을 받아 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특히 조금 큰 교회들의 경우는 더 그랬다. 내가 답 메일을 받은 목사님은 딱 두 분이었다. 한 분은 김양재 목사님이다. 그분은 정말로 내 메일에 답 메일을 보내주셨다.
하지만 내가 당신의 교회 부목사가 되려고 메일을 보낸 것으로 오해했다. 모든 목사는 동역자가 아니던가. 내 머리속에는 부목사도 다른 교회 목사도 없다. 어쨌든 그분은 내가 보낸 메일에 반응을 보인 최초의 목사님이었다.
다른 한 분은 박철수 목사님이다. 그 교회 게시판에 글을 올렸고 그곳도 역시 내 글을 삭제해서 그에 대한 항의 메일을 보냈더니 답 메일을 보내주셨다. 하지만 해명이 있었을 뿐 그분 역시 내가 내민 교제의 손길을 잡지는 않으셨다.
나는 우리 교회에 새로 오신 분들 가운데 다른 교회를 다니셨던 분은 그 교회 목사님에게 전화를 걸어, 오신 분이 우리 교회에 다니셔도 되는지를 묻는다. 하지만 실제로 통화를 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전화 통화가 불가능했다. 특히 대형교회의 경우는 통화 자체가 불가능했고, 작은 교회의 경우도 그런 전화를 하면 나를 미친 사람 취급했다.
이런 짓을 하는 내가 정말 미친놈인가.
나는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 내 교회와 네 교회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나와 같거나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교회나 목사나 성도들은 없었다. 다 자신들의 것이 있었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들이 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와 형제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어쩌다 그런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경우도 그것이 지속된 경우는 없었다. 그것이 다만 영원에 익숙하지 못한 인간의 한계일 뿐일까. 글쎄다. 비록 내가 부족한 사람이란 걸 잘 알고 있지만 만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럴 수 없다.
내 큰 딸은 피아노를 전공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연습실 옆에 작은 교회가 있었다. 수요 예배가 열리고 있었는데 반주자가 없었다. 아이가 들어가 자기를 소개하고 반주를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 딸이기 이전에 우리 교회 교인답다.
그랬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를 다른 교회로 생각하지 않는다. 두 번째 달부터 다른 교회들과 헌금을 나누기 시작했다. 시골교회도 있었고, 공동체도 있었고, 타국의 선교사들도 있었다. 거기에 어려운 사람이 더해졌다. 그 일은 우리 교회가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않고 휴면상태에 있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매와 형제들이다.
형제애는 제자들의 사회의 가장 현저한 특징이다. 제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는다. 예수를 좇기 위해 자기의 소유는 물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린다. 식구까지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좇을 수 없다. 그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가족들을 만난다. 다른 제자들이다. 그리고 자기 가족을 확대된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다시 만난다. 그 관계는 이전의 혈연이 아닌 거듭난 후의 새로운 만남이다.
혈연관계는 깨어질 수 있다. 특히 요즘처럼 돈이 모든 것인 자본주의 시대에는 유산을 놓고 싸우다 갈라지는 것이 오히려 정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의 가족은 깨질 수 없다. 영원의 세계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관계를 입증하는 것이 형제애이다. 그 형제애는 아가페를 지향하는 필레오의 사랑이다. 우리가 주님 품에 가거나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그 형제애는 온전한 신의 사랑인 아가페가 될 것이다.
초기교회와 기독교 역사 곳곳에 존재했던 성령공동체들 속에서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도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지 않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그들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었다. 지금도 그런 공동체들이 지구촌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 나라인 성령공동체들은 오늘날 교회로부터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는다.
내가 쓴 글을 보고 글을 좀 상식적으로 쓰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관점으로는 비상식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안타깝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도 복음이 말하는 형제애를 살아내기가 어렵다. 우리는 반드시 좌절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실패와 좌절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존재로 빚어진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불가능에 도전하여 실패함으로써 좌절하고 그 좌절을 통해 사랑을 배우고 사랑으로 변화된다.
하나님 나라에는 큰 사람도 작은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사람도 없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모두가 평등하게, 가장 인간답게 생생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실을 모른다면, 교회에서 이런 노력들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도 교회도 아무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