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미국 LA에서 개최된 하계올림픽은 바로 다음 올림픽 개최국으로 지정되었던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유독 더 관심이 가는 국제 행사였습니다. 힘을 다해 올림픽을 유치한 직후였으니 이전 개최국인 미국의 사례를 잘 지켜보고 참고해야하겠다는 ‘타산지석’의 마음이 있었다 할까요.
세계 각 나라에서 모인 선수들이 함께 생활하는 올림픽선수촌은 다양한 문화의 자잘한 충돌이 일어나는 곳이어서 소식도 많고 소문도 많았는데요.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재미난 뉴스가 하나 있었습니다.
세계의 눈이 쏠린 현장인만큼 소식은 일파 만파 퍼져나갔고 선수들의 영양이나 체력에 민감한 각 나라 스포츠생리학자들은 귀를 세우며 큰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요.
그 소식이 무엇이냐.. 솔직히 ‘소식’이라 부르기에도 좀 남부끄러울 수 있는 작은일입니다만... 미국 대표팀 선수들이 자신들의 기본 식단에 더해서 무제한의 바나나를 주최측에 요구했다는 소식이 그 뉴스였습니다.
요즘이야 바나나가 몸에 좋은 줄 다 알고 계시고 특히 취미로 운동을 하시는 분들은 더더욱 자세히 알고 계십니다만 당시 미국에선 사정이 좀 달랐습니다. 바나나는 싸구려중에 싸구려로 취급 받는 과일이었고 또한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단백질을 선호하는 운동선수들에겐 약간의 기피음식이었다 할까요. 그러니 미국팀의 요구가 더 더욱 이상하게 들릴 밖에요.
올림픽에 출전한 최고의 운동선수들이, 그것도 세계 최대 강대국인 미국의 선수들이, 금메달의 영광을 국가에 돌릴수도 있는 자랑스런 얼굴들이, 그깟 바나나를 요구하다니..
그런데 이후 정말로 미국선수들은 틈만나면 바나나를 먹어댔습니다. 훈련전에도 먹고, 훈련 끝나도 먹고, 아침에도 먹고, 저녁에도 먹고.. 그리고 이 바나나 중독에 걸린듯한 선수들의 일상이 신문기사에까지 오르게 됩니다.
바나나는 미네랄을 많이 함유한 과일입니다.
그 중에도 특히 칼륨(K)과 마그네슘(Mg)이 풍부한데요.. 칼륨은 신경세포 성장에 관여하여 정보전달을 원활하게 하고, 손상된 근육의 치료를 가속화하는 미네랄로 알려져있습니다. 또한 마그네슘은 신경을 안정시키는 기능과 더불어 근경련을 예방하는 기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구요.
그러니 이 두가지 미네랄이 풍부한 바나나는 고강도의 훈련으로 언제나 근육부상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운동선수들에겐 보약과 같은 존재가 될수 있는 것이었지요. 요즘엔 누구나 알고있는 이 상식이 당시엔 미국 스포츠생리학팀의 비밀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선수들이 다량의 바나나를 섭취케 하는 전략을 세웠던 겁니다.
정말로 바나나가 제 역할을 했던 것일까요. 미국은 압도적인 금메달수를 자랑하며 당연한 듯 1위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후 바나나는 많이 먹어봐야 변비나 걸리는 원숭이음식에서 스포츠인의 필수 동반자로 급격한 신분상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세계에 유통되는 바나나들은 주로 중남미와 필리핀에서 생산됩니다. 이 곳 뉴질랜드에는 멕시코나 에쿠아도르산이 많이 유통되구요,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에 유통되는 바나나는 90% 이상이 필리핀산입니다. 당연히 필리핀에는 광활한 바나나 농장이 셀 수 없이 많고 모든 농장들은 아직도 100년전부터 전해져 온 방식으로 바나나를 기르고 수확합니다.
바나나 농장의 일과는 아침 7시가 되기도 전에 시작됩니다. 한 낮 온도가 40도를 넘는 날이 부지기수이고 바나나가 뿜어내는 수증기 덕분에 습도가 매우 높아 최대한 시원한 시간에 일을 하려는 것이죠. 이곳에서 운반 노동자들은 땡볕이 내려쬐는 몇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하루 열시간씩 중노동을 합니다. 바나나 수확하는 일이 힘들어야 얼마나 힘들겠냐구요?
일단 농장의 크기부터가 문제입니다. 구획을 나누어 관리하고 수확하는 시스템 덕분에 중간 중간 도로가 뚫려있다고는 하지만 도로사이의 재배지역이 워낙에 넓어서 순전히 인력으로만 바나나를 옮겨야 하는 거리가 때론 1Km를 넘기기도 한다는군요.
바나나 한 송이의 무게가 평균 20~30Kg 정도인데 그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그 먼거리를 이동한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농장주들은 이미 100여년 전에‘가변형 레일시스템’을 개발하여 현재까지도 이용하고 있습니다.
어른 키보다 조금 높을만한 위치에 철파이프로 레일을 가설하고 거기에 일정한 간격으로 바나나 송이를 메달아 한 번에 300송이 정도를 옮기는 시스템인데요.
큰 정육점에 주렁주렁 매달린 소 반마리나 돼지 반마리들을 연상하시면 될 듯 합니다. 하지만 이 시스템도 열대정글과 같은 경작지의 상황상 확장하는데 한계가 있어서 전체 이동거리의 절반 정도는 노동자들이 등짐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레일시스템을 이용한다 하더라도 200미터 가까이 늘어서 있는 바나나의 어마어마한 무게를 겨우 네 다섯명이 쟁기를 끄는 소마냥 끌어야만 하기에, 이 또한 등짐과 별반 다를바 없는 중노동이라 하는군요.
그런데 때론 어깨뼈가 빠지기도 하는 살인적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것은 이들이 옮기는 바나나에 상처를 입히지 않아야 한다는 금기사항이라 합니다.
전량 수출을 할 귀한 물건들이기 때문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조심에 또 조심을 해야한다는데요. 그래서인지 가끔 레일이 말을 안듣고 멈춰서거나 하더라도 바나나 송이를 직접 당기거나 밀수 없어서 가진 애를 쓴다고 하네요.
한 노동자가 인터뷰를 통해 이런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동네에 태어난 순간부터 이 일을 하도록 정해진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가격이 비싸서 우리는 사 먹을수도 없는 고급바나나를 평생 져 나르는 노동을 천직으로 삼도록 정해진 거죠..’
한달에 NZ$100 조금 안되는 급여를 받으며 생활해야 하는 노동자의 덤덤한 고백은 차라리 한탄에 가까웠습니다.
부엌 벤치 한 켠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바나나 몇 개..
아이들은 점심도시락에 가져가면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고, 어른들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갈색으로 변해 보기 흉하다며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노란 바나나..
순간 우리가 이렇게 바나나를 홀대하는 것을 필리핀의 운반 노동자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슬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내 삶에서 큰 가치를 지니지 않는 무덤덤한 것이라 해도 그 뒷배경엔 많은 이들의 고난과 눈물과 땀이 배여있을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더불어 타인의 노력과 희생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희생과 노력으로 맺어진 열매가 타인에 의해 무시되고 평가절하되는 아픔도 있을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길고 길었던(?) 여름방학의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는 한 주를 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떤 학생들을 한국에 다녀왔고 또 어떤 학생들은 해외여행을 다녀 오기도 했습니다. 몇몇이 모여 남들 다 노는 시기에 땀 빼며 공부했던 학생들도 있고 그 학생들이 비지땀에 몸 적시며 공부하는 동안 옆 강의실에 숨어 앉아서 게임을 하던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마음자세로, 또한 어떤 노력을 하며 방학을 지냈는가에 관계없이 2018년 방학은 이제 과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의 앞에는 2019년을 통해 헤쳐나가야 할‘학습’의 열대정글이 펼쳐져 있습니다.
이 험하고 두려운 1년의 시간을 이제 학생들은 자신만의 바나나송이를 어깨에 짊어지고 헤쳐나가야만 합니다. 어쩌다 좋은 선생님과 멘토라는 레일시스템을 만나 허리를 펴는 날도 있겠지만 레일을 당겨 바나나를 직접 운반하는 노력은 어디까지나 오롯이 본인에게 할당된 노역일 겁니다.
때로는 습기 가득한 무더위에 숨이 막혀 정신줄을 놓고 싶을때도 있을것이고 때로는 기껏 올라선 언덕에서 미끄러져 똑같은 고생을 한번 더 반복해야 하는 분통터지는 나날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것은.. 자신의 바나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팽게치거나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겠죠. 설사 바나나를 지키려다 중심을 잃고 넘어진다 해도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절대로 바나나를 놓쳐서는 안될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년을 살아내고 올해의 마지막을 맞이했을 때..
우리가 다다른 길의 끝에는 한 송이 탐스런 바나나가 함께 할 것이고, 물집 잡힌 손과 피 배인 발바닥을 툭툭 털어가면서 우리는 바나나 특유의 달콤함을 즐기며 행복해 할 겁니다.
그런데... 맛만 있을까요?
그동안 손상되었던 근육을 재생시키는 칼륨도 많고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죽지를 가라앉히는 마그네슘도 풍부하다니 고생하며 몸 축날일도 그리 걱정스럽지는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껏 게을렀던 무릎을 툭툭 두들기며 일어나 어디한번 등짐을 지어볼 일입니다. ‘땀에 젖은 바나나를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말도 섞지 말라’는 옛 말씀도 있으니 어차피 해야 할 일, 일찌감치 서둘러 땀 빼는 것이 나을듯 합니다.
칼럼니스트 김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