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저 암살날 3.15 부정선거 저질러
Newsroh=김태환 칼럼니스트
필자가 1954년 부산에서 초등학교 (부산 사범 부속)를 마치고 서울에 와서 K 중학교에 합격하고 당시 덕수국민학교 가(假) 교사(校舍)에서 공부하였는데, 화동의 본교는 아직도 미군이 통신기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해 (1학년) 봄 우리는 명동에 있는 국립 극장에서 공연중인 세익스피어 원작인 ‘줄리어스 시저’ 연극을 보러 갔다.
그 많은 대사 가운데에서, 지금도 “3월 15일을 주의하소서 (Beware of Ides of March)” 라고 점쟁이가 시저에게 경고하는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게 들려온다. 필자는 선생님들께서 다른데서는 들어 볼 수 없는 훌륭한 교습도 중요했지만, 이처럼 과외로 서양사를 배우기 전에 연극 관람을 통해서 문학과 역사 그리고 영웅 이야기를 배우는 장을 마련해준 학교에 두고두고 감사하는 마음이 끊이지 않는다.
마침, 오늘이 3월 15일이라, 역사적으로 그날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을 음미해 보려 한다.
먼저 일어난 일은 기원전 44년에 그 유명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 영어식 쥴리어스 시저) 가 공화제를 폐지하고 왕이 되려 한다고 우려한 원로원 의원들이 음모를 꾸며 그를 칼로 마구 찔러서 (23번) 암살한 사건이 있다.
다음으로는 1960년, 대한민국에서 3월 15일 부정 선거로 이승만을 네번째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그의 후계자로 될 것이 확실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켰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당선되었다면 누가 무삼 말쌈을 하련만, 부정 선거였기에 한국 정국에 큰 변혁이 오게 되었다.
먼저, 시저의 암살 사건에 앞서 그가 이룩한 많은 훌륭한 업적들 ‘골(Gaul: 현 프랑스 지역) 정복등’과 그의 유명한 명귀들 ‘주사위는 던져졌다 (alea iacta est English: Die is cast!)’, 그리고 쉽사리 이긴 전쟁을 원로원에 보고하면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 라고 적었다.
또한 시저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곳 여왕 클레오파트라와의 염문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클레오파트라가 그의 아들 (Caesarion) 을 낳았다.
시저는 그의 정적을 차례로 물리치고 자신을 종신 독재관으로 선언하였다. 이에 브루터스와 캐시우스가 주동이 되어 공화정을 복원하기 위해 시저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한 점쟁이가 ”3월 15일을 주의하세요” 라고 외치며 그의 집 주위를 맴돌며 경고하였고, 그의 부인 (Calpurnia) 은 간밤의 꿈이 불길하다고 그날 원로원 출석을 하지 말도록 권유하였다.
기다려도 시저가 나타나지 않자, 브루터스가 시저 집으로 가서 “아니 시저, 당신은 아녀자의 꿈 소리와 어리석은자들의 가십에나 신경을 쓰고 원로원에서 당신에게 공훈을 하사하고 특히 당신이 직접 소집한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아 원로원 의원들이
하릴 없이 맹탕으로 하루를 보내게 한다니 말이 됩니까?”하고 그의 원로원행을 채근해서 데려 갔다.
가는 길에 그 점쟁이를 마주치자, 시저는 “오늘이 3월 15일이야, 그래도 아무 일 없는데!”하고 조롱하듯 말하자 그말을 들은 점쟁이는 “그래도 오늘이 다 지나지는 않았지요” 하고 또 한번 경고를 발했으나, 그는 귓전으로 흘려 보내 버렸다.
원로원에 시저가 도착하자 음모꾼들이 시비를 걸고 밀쳐서 그가 바닥에 넘어지자, 그들이 숨겼든 단검을 빼들고 마구 찔렀다. 그 와중에 브루터스도 끼어 있는 것을보고 시저는 대경실색하여 “브루터스, 너마져 (음모꾼의일당이야)? (Et tu Brute?)”라고 부르짖었다 한다.
브루터스는 시저가 각별히 총애했는데, 그 (시저)의 사생아 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고 실재로 시저는 부르터스의 엄마와 15세 때부터 교제를 했다고 한다.
브루터스의 변은 “나는 (시저보다)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였다. 시저의 사후 로마의 내전이 일어났는데 최후의 승자는 시저의 양아들인 옥타비안(Octavian )이 되었고 그는 곧 황제가 되어 아우그스투스(Augustus) 라 불리운다.
그러면, 우리 한국에서 일어난 3.15 부정 선거와 그 파장을 살펴보자. 한국의 5천년 역사상 동족을 가장 많이 도살한 이승만은 그 유명한 태종 이방원이 왔다 기절초풍하고 한 수 배워가야했다고 놀라움을 표시했다는데, (태종은 정권이 안정되자 왕씨도 생업에 종사하도록 사면령을 내렸다한다) 그는 이미 3대에 걸쳐서 12년간 장기 독재를 해왔고 이미 1959년 5월 하순부터 망녕이 들어서 프란체스카여사가 박찬일 비서와 정국을 주물러서 이승만은 사실상 유고(有故: incapacitation) 상태에 있었지만,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이 박사는 고령에 망녕을 부려서 사실상 통치할 능력이 없는데도 자신을 지지하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어 그에게 대권을 물려줄 심산으로 3.15 부정 선거를 기획했다. 혹자/아니라 많은 분들은 부정선거 기획은 이박사가 한것이 아니라 아랫사람들이 했다고하나 대통령제에서는 아랫사람들의 잘못을 다스리지 못한 것도 대통령의 책임이다.
그 부정 선거를 어떻게 시행했는지는 별로 설명하시는 분들이 없어서 여기서 설명 드린다. 도시에서는 잘 배운 사람들이 많아서 함부로 할 수 없으나, 잘 배우지 못한 무지랭이 들이 많이 사는 시골에서는 투표자 세사람을 한조 ( 3인1조) 로 묶어서 투표장에서 같이 투표하고 나서 서로 보여줘서 여당인사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부통령)에 투표한 것을 확실하게하고 확인시켜서 꼼짝달삭 못하고 이승만/이기붕을 찍도록 강제하는 불법 선거 방식을 강요했다.
이기붕과 부인 박마리아, 두 아들 모두 자살인지 타살인지 다 죽었다. 그들의 권력욕 때문에 많은 희생을 치뤘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부통령 자리를 강력히 희망하는 이기붕은 그 당시 말도 못하고, 기동도 못하며, 휠체어를 타고 이동할 때, 대소변기를 함께 달고 다녔다고 한다.
아이크 대통령 비밀 특사로 온 월트 져드 (Walter Judd) 하원 위원이 1959년 10월 하순에 와서 경무대로 이박사를 방문했을 때 이 박사는 그의 후계자 얘기를 차마 꺼낼 수 없었든지 져드 의원이 물었을 때 겨우 이기붕 국회의장이 다리가 아프다는 말만했다
4.19가 나고, 데모대가 그의 충정로 집을 습격할 때 이씨 일가는 6군단에 피신했는데, 그 당시 경무대의 박찬일 비서가 이박사가 다음날 아침에 “허정, 변영태, 이범석, 윤치영등 5명을 시국 관련 협의를 하고 싶다고 이기붕 의장의 의견을 알아보려 한다니, (이기붕의 부인인) 박마리아가 전화기를 훽 건네 받아서, “허정과 변영태 두분만 부르라”고 지시했다. 이 광경을 본 6군단장실에 있든 분들은 모두 놀랬다 한다.
이는 뭘 말하는가? 이 기붕은 말도 못하고 판단도 못하는 100 퍼센트 병신이고 ‘박 마리아’가 바로 이기붕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만일 4.19가 일어 나지 않았드라면, 이박사가 사직하면 이기붕 부통령이 명목상 대통령으로 승계하지만 (오호통재라!!!) 대한민국은 여장부 박마리아의 통수권 아래 놓여서 신음하며 살았을 것이다.
다행히도 마샬 그린이 이박사를 미국으로 납치해가서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방지해줘서 지금도 아이크에 한 없는 감사를 드린다. (주 1)
필자 주
주 1 : 이박사는 내가 하와이로 축출했다 그린 증언
http://blog.koreadaily.com/teddykim/1059910
과거를 되돌아보면 미래를 알 수 있다(관왕지래: 觀往知來)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환의 한국현대사 비화’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k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