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3.1 독립운동 사실을 빠르게 보도했던 호주, 뉴질랜드 신문들이 이후에도 한국민의 독립 열망을 생생히 전달한 사실이 확인됐다. 사진은 도산 안창호의 활동을 다룬 멜번 기반의 ‘더 헤럴드’ 기사.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 부각... 한민족 독립 열망 생생히 보도
100년 전 한반도 구석구석에서 울려 퍼진 3.1운동의 함성을 대양주 지역에 보도했던 호주 및 뉴질랜드의 언론들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체계적인 독립투쟁에도 큰 관심을 보인 사실이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3.1 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1919년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 언론 매체의 한반도 상황 기사 자료 발굴에 나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아세안 지역회의(부의장 이숙진)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9일 발표한 자료를 통해 드러났다.
민주평통 아세안 지역회의가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전례없는 민족적 독립운동 소식에 신선한 충격을 받은 듯 호주와 뉴질랜드의 언론들은 일제의 민족 말살정책을 적극 부각시킴과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 항쟁을 입체적으로 분석했다.
특히 양국의 다양한 언론 매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 등을 상대로 독립을 위한 전방위 외교전을 펼친 사실이 생생히 기록됐고, 임시정부의 활동에 한국의 기독교, 불교, 천도교 등 여러 종교 단체들이 적극 협력한 사실이 기술됐다.
뿐 아니라 한국에 체류 중이던 미국의 선교사들이 한국의 독립 항쟁 사실을 서방 세계에 알렸고, 한국 독립을 위해 미국 정치권을 상대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도 기록됐다.
특히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일본에 강제 합병된 지 9년이 됐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은 독립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있다”고 전했으며 남부 호주(South Australia)의 ‘옵저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워싱턴에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사실을 생생히 보도했다.
멜번(Melbourne)의 ‘더 헤럴드 선’(The Herald Sun)의 전신인 ‘더 헤럴드’(The Herald)는 임시정부 대표단이 북경에서 미 하원의회의 스티븐 포터 외교위원장을 만나 한국 독립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호소한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
전국민의 독립 열망 전해
1919년 4월10일 호주의 유력 일간지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칭하며 “일본의 강제 합병 이후 9년의 시간이 지나고 일본의 강압정책이 진행 중이지만 국민들은 독립의 열망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드니 모닝 헤럴드는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의 독립 실현은 매우 난망하다”면서 “미국이 필리핀에서 20년째 손을 떼지 않고 있는 상황이라면 한국의 독립은 더욱 더 희망이 없어지는 듯하다”고 진단했다.
신문은 “이미 20년 전부터 한국은 근대 국가로의 개혁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과격 개혁주의자들의 무분별한 폭력성은 국가적 개혁이 시기상조임을 드러내면서 실패했고 일본이 이런 틈을 노렸다”고 지적, 눈길을 끌었다.
멜번 ‘The Herald’
안창호 활동, 비중 있게 보도
1920년 10월14일, 멜번의 ‘더 헤럴드’는 “한국인의 희망: 독립 요구”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동장관을 맡고 있던 안창호 선생이 대표단을 이끌고 북경을 방문해 미 하원의회의 스티븐 포터 외교위원장을 만나 독립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호소한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신문은 이날 회담에서 안창호 선생은 “일본이 한국의 자치권 일부를 인정하고 현재의 압제를 완화하겠다는 등 다양한 합의에 나설 수 있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오직 완전한 독립(absolute independence)과 자유일 뿐”이라 선포했다고 전했다.
더 헤럴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Korean Republic)가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 임시주소를 두고 있다는 점도 덧붙여 설명했다.
신문에 따르면 안창호 선생이 이끄는 임시정부 대표단은 홍콩도 방문, 미 의회 관계자들과 접촉했다.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압제는 지속됐다는 점을 이 신문은 부각시켰다.
일본 한반도 압제, “러시아 전제정치와
나치 독립의 혼합체” 지적도
1919년 8월 23일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안’(Western Australian) 지는 ‘한국의 일본: 제국주의적 군사 지배’라는 지목으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러시아의 전제 정치와 나치 독일의 혼합체”라고 분석했다.
신문은 “일본은 군사적 지배를 통해 한국어 사용조차 금지시켰다”면서 “한국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면 형사범죄 처벌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흥미로운 점은 신문의 이 같은 분석이 공직에서 막 물러났던 일본의 오쿠마 시게노부 전 일본 총리와의 대담을 통해 제시됐다는 점이다. 오쿠마를 인터뷰 한 시드니의 중견 언론인 아데인 맥케이(Adain McCay)의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극히 부정적인 시각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오쿠마는 인터뷰에서 한국 문제는 적극 회피하면서 ‘호주 백호주의 정책’의 문제점을 적극 물고 늘어졌다는 사실을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안’은 상세히 기술했다.
‘디 오스트레일리안 워커’,
이승만 박사 기고문 전재
현 NSW 주 노동조합 회보지의 전신으로, 20세기 중반까지 일반 신문으로 발간됐던 ‘디 오스트레일리안 워커’(The Australian Worker)는 1919년 7월31일 자 신문에 이승만 박사의 기고문을 소개했다. 이와 함께 신문은 “이승만 박사는 효과적인 독립투쟁마저 차단하고 있는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에 대해 매우 선명히 기술했다”고 평했다.
기고문에서 이 박사는 “대한민국의 유구한 역사와 문명에 기초한 문화적 우월성을 적극 부각시키며 일본의 강제 합병 시도는 반드시 무너진다”고 강조했다.
더 선, 미국 선교사들의
독립운동 지원 상황 조명
1920년 1월30일 더 선(The Sun. 1903년 창간, 훗날 시드니 모닝 헤럴드와 헤럴드 선에 분할 통합됐다)은 “한국 전역에서 펼쳐진 혁명적 움직임에 일본이 개혁 등의 다양한 유화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한국은 결코 이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또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한 기독교인들과 미국인 선교사들의 활동상을 자세히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아울러 “미국인 선교사들은 자국 정치권의 한국 독립에 대한 관심 고조를 위해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 내의 독립운동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이어 더 선은 “상해에 기반을 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한국 및 미국 내의 기독교 단체와 깊숙이 연대했다”고 덧붙였다.
NZ ‘이브닝 스타’,
천도교 등 한국 종교단체 독립 항쟁 소개
1919년 7월7일 뉴질랜드 ‘그레이마우스 이브닝 스타’(1866년 창간, 현재 제호는 ‘그레이마우스 스타’)는 일본의 탄압 실태와 한국의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한 독립 항쟁을 집중 조명했다.
신문은 “북경에서 한국의 독립 운동을 이끌고 있는 다수의 비밀 조직을 수백만 명이 지원하고 있다”면서 “가장 대표적인 조직이 약 200만의 교세를 지닌 천도교(the Heaven Worshippers)”라고 소개했다.
신문은 또 한국의 독립운동에 기독교인들과 불교도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면서 “한국에는 사찰 2천여 곳에 승려가 10만 여명에 이른다는 점에서 일본 당국은 젊은 승려 다수를 일본으로 유학 보냈지만 이들은 오히려 항일 운동에 앞장섰다”고 보도했다.
‘NZ 헤럴드’
“일본, 1920년부터 한국어 교육 금지”
뉴질랜드 유력 일간지 ‘뉴질랜드 헤럴드’는 1919년 8월25일자 신문을 통해 ‘일본의 잔혹한 흡수 정책’을 조명하면서 “1920년부터 학교에서 한국어 교육이 전면 금지된다”는 사실을 알렸다.
신문은 “일본의 강압 정책에 대한 한국의 저항이 더욱 확산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적 동화정책은 난관에 직면했다”고 덧붙였다. 또 9월12일자 신문에서는 “워싱턴에서 접수된 한국 발 소식에 따르면 독립운동이 다시 거세게 재개되면서 서울과 주요 도시의 상가가 모두 철시됐다”고 전했다.
QLD ‘데일리 스탠다드’,
독립운동 피해 상황 수치 제시
1921년 12월5일 ‘더 데일리 스탠다드’(1912-1936, 브리즈번)는 “한국 내의 제국주의”라는 기사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과 독립운동에 따른 한국인들의 피해 상황을 소개했다.
신문은 (3.1) 독립운동이 시작된 이후 일본에 의한 한국인 사망자 수가 7645명, 부상자 4만5562명, 투옥자 4만9311명이며, 가옥 724채, 교회 59곳, 학교 3곳이 불에 탔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치를 전달했다.
또한 일본의 강제 합방 이후 총 61만6839명이 체포되거나 투옥됐으며, 총 27만8087차례에 걸쳐 태형이 집행됐고 10%가 곤장의 참혹한 형벌로 인해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또한 “일본은 한국인들의 정치적 입김 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형태의 단체 조직을 불법화했다”는 내용도 보도했다.
‘더 웨스턴 메일’,
이봉창 열사의 일본 왕 암살 기도 사건 보도
1932년 1월14일 ‘더 웨스턴 메일’(1885-1955, 서부 호주 퍼스)은 ‘일본 왕 암살 모면… 한국 극단주의자의 분노’라는 제목으로 이봉창 열사의 히로히토 왕 암살 기도 사건을 자세히 다뤄 눈길을 끌었다. 신문은 이봉창 열사를 ‘Rihosho’로 표기하면서 ‘한국의 공산주의자’라고 잘못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