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얄 보타닉 가든
나에게는 꿈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장소가 있다. 이곳은 바다와 자연이 어우러져 모든 사람들이 즐기기에 쾌적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옛 고목을 만나기도 하고 이름 모를 꽃들도 익히게 된다. 평상시 즐겨 찾는 장소인지라 꿈속에서 자주 등장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내가 이곳을 좋아하는 것은 쉽게 접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기도 하거니와 수 천 종류의 꽃과 나무들과 새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이곳에 오면 보드라운 잔디 위에서 아름드리나무를 안아볼 수도 있으며, 여러 가지 꽃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거니와 새들의 노래 소리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첫 영국 정착민들이 도착 했을 때 지금의 로얄 보타닉가든은 이들의 생존여부를 가름하는 중요한 장소였다고 한다. 식량수확을 위한 호주의 첫 유럽식 농장으로 개발했다가 1816년경 다시 식물원으로 조성되어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왔다. 오페라하우스 바로 옆에 위치해있어 바다경치와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식물원이라는 점이 모든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잡는다. 30만 제곱미터의 크기의 왕립식물원인 이곳은 10개의 테마공원으로 이루어진 시드니에서 가장 큰 공원이기도 하다. 멸종위기의 식물관, 희귀 소나무숲, 열대식물관등 처음으로 보는 식물들이 우리를 맞아준다. 다니엘 솔란더라는 사람이 동호주를 돌며 모은 식물들로 식물원이 꾸며지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1954년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이곳 호주를 처음 방문하여 식물학 및 원예학 연구를 선도해온 것이 인정되어 ‘로얄’이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이곳 식물원에는 한국의 성황당 같은 역할을 하는 나무도 있다. “Walking around the Wishing Tree and make wish“(이 나무를 돌며 원하는 바를 빌면 소원이 이루어지기도 한단다). 어쩜 우리네와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다니 인류의 뿌리는 한 조상이 아닐까. 언제라도 이곳을 찾으면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자연의 선물로 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을 찾게 되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힘들 때도 이곳을 찾으면 100여 년을 묵묵히 견디어낸 고목의 의연한 자세에 내 영혼이 숨 쉴 수 있음을 감지하기도 한다. 모든 꽃과 나무들의 열정에 마음이 절로 숙연해지기도 하고.
정오가 되면 갑자기 잔디 위를 빠르게 질주하는 사오십 명의 건장한 청춘 남녀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인근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인들로 점심시간을 이용해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다. 얼마나 빠르게 뛰는지 젊음의 열기가 훅훅 넘쳐난다. 몇 번을 왕복으로 뛰는지 온 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고 그들은 어디론가 빠르게 사라져간다. 이들을 바라보며 불현듯 한 귀절이 떠오른다.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삼 십 몇 해를 살았던 내 조국의 풍경이다. 고적지나 공원이나 어디든 푯말을 꽂아 두었었다.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다닐 때도 잔디밭을 밟을세라 주의를 주었던 모습들이 생소하게 느껴진다. 잔디밭에서 사진이라도 한번 찍으려면 남의 눈치를 살피며 잔디위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지금은 이런 정책이 바뀌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각 나라마다 국가정책이 다르겠지만 어쩜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것인가. 우리나라에도 유구한 역사와 문화유산들을 자랑하고 있다. 서울에는 고궁이 또 얼마나 많은가. 여기 호주는 국가가 세워진 지 200여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인류애를 사랑하고 한 인격을 존중히 여기는 생활습관이 빛을 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6. 25가 발발 했을 때에도 호주군인들을 한국에 보내어 자유를 지켜 주었던 그 숭고한 정신이 살아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그 옛날 부산의 유엔묘지를 찾았을 때 수많은 나라에서 파병한 병사들의 묘지를 본 일이 있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는 코리아에 생명을 바친 젊은 장병들에게 감사의 묵념을 올렸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들은 자유를 실천하기 위해 머나먼 동쪽 끝 조그만 나라에까지 찾아와 자신의 생명을 바친 세상의 가장 빛나는 영웅들이기도 하다.
올 해는 내가 호주에 정착한지 삼십 년이 되는 해이다. 이곳에 살면서 호주 정부로 부터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다. 호주 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남아있는 여생을 이 사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도서관에서의 봉사는 어떨까. 아니 그것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식물들이 살아 숨 쉬는 이곳. 황금박쥐가 나무에 매달려 자유를 노래하는 곳. 철따라 피는 꽃들이 모든 방문객들을 환영하는 로얄 보타닉가든에서의 봉사가 더 보람 있지 않을까. 가끔 떨어져 있는 휴지들을 줍는 일이 더 시급하기도 하고. 눈을 이곳으로 돌려보아야겠다.
김인호 / 수필가, 시드니한인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