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구의 마라톤 산책
Newsroh=강명구 칼럼니스트
1907년 고종은 마지막 승부수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사람을 특사로 임명하여 헤이그에 파견(派遣)했다. 이준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설립된 법관양성소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최초의 검사로 한성재판소에서 법관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친일행위를 한 상사를 고발하는 등 사회정의 실현에 노력했으나 중상모략(中傷謀略)으로 면직을 당하고 만다.
고종은 그의 강직함과 애국심 그리고 법관으로서의 뛰어난 법리해석이 만국회의의 특사로 자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준은 1907년 4월 22일 부산에 잠시 출장을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후 다시는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조국을 떠났다. 4일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상설과 합류하여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달려갔다.
이곳에서 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을 만나 합류했다. 이준은 법률가로서 을사늑약(乙巳勒約)의 부당성을 알릴 수 있고, 이상설은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한 경험이 있고 이위종은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불어를 비롯한 러시아, 영어에 능통하였다. 이들은 그야말로 환상의 조합이었다.
이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6월 25일은 만국평화회의가 열린지 이미 열흘이 지난 후였다. 그들은 곧바로 회의장인 비넨호프 궁전으로 달려갔지만 나라를 잃은 왕이 임명한 특사는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열강들은 을사늑약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현실을 받아들였다.
사람의 운명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하여 급물살을 타고 물줄기가 변하기도 한다. 2년 전 나는 삶이 공허하다고 느꼈고, 중년사춘기에 방황하였다. 느닷없이 미대륙횡단 마라톤에 나섰다. 만 57 세의 나이, 우리 나이 59 세의 나이에 가슴 벅찬 도전가의, 탐험가의 길을 나섰다. 그리고 성공을 했다.
나는 그때 이모작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탯줄이 필요했다. 하늘과 대지에 연결하는 탯줄을 스스로의 배꼽에 연결해 모든 낡은 에너지를 방전시키고 새로운 에너지로 채우고 싶었다. 내가 작은 발걸음을 모아 뉴욕의 유엔빌딩에 도착했을 때 나의 몸은 난파선에서 구조된 사람처럼 야위었지만 강인한 생명의 의지로 충만하게 되었다. 나는 그 여행으로 다시 태어났다.
내가 뉴욕의 함마슐트 광장에 들어왔을 때 어느 기자가 인터뷰를 하면서 내게 다음 도전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내가 “아무 생각이 없다.”고 대답했더니 ‘막연히’라도 생각하는 것이 없냐고 물어보아서 “그저 막연히 유라시아 대륙을 달리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는 기사에서 “강명구씨 다음 도전은 유라시아 대륙!”이라고 썼다. 그야말로 기자에게 낚인 대답이 기사가 되고, 그것이 정말 나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이제 나는 110년 전 이준 열사처럼 헤이그로 ‘평화의 특사’가 되어 날아간다. 잃어버린 제국의 왕이 임명하여 외교권을 인정받지 못한 슬픈 특사처럼 스스로가 임명한 짝퉁특사는 외교관의 권리는 누리지 못하겠지만 행복한 특사가 될 것이다. 시민들이 임명해 주어서 힘을 실어주었고 몰래 부산에 출장 간다고 집을 나서지도 않고, 광화문에서 시민들과 함께 성대한 출정식(出征式)을 가지며 출국할 것이다.
이준열사가 이루지 못한 110년 묵은 ‘자주독립’의 꿈을 가슴에 안고 당당하게 출국할 것이다. 나가서 16,000km, 16개국을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으며 두 다리의 힘으로만 달리며 지난겨울 우리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이루어가는 장면들을 세계시민들하고 이야기하고, 전쟁 없는 세상의 꿈을 나누며, 한반도의 평화통일이 세계평화를 얼마나 앞당기게 될 지를 토론하고 오겠다.
110년 전 당시 유럽은 정부차원에서는 식민지 각축전이 벌어졌지만 또한 시민운동이 태동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헤이그에는 시민운동가 및 언론인들이 속속 몰려들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일행은 만국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언론매체들을 향해 장외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서방언론은 한국의 현실에 대해 상세히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1907년 7월 14일 이준은 의문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 56년 만인 1963년 그의 유해(遺骸)가 고국으로 돌아와 수유리에 안장(安葬)되었다.
난 게으름뱅이였고 나태했다. 좀처럼 긴장의 끈을 조여 매지 못했다. 간혹 조여 매면 너무 조여서 끊어지곤 했다. 난 늘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내일 할 일을 다음 주로, 다음 달로 미루었다. 그러나 이제 자주평화통일의 문제는 더 이상 내일로, 다음 달로, 내년으로 미룰 수가 없다. 사실 이 일은 아버지 세대에서 하였어야 할 일이었다. 그들은 이 커다란 짐을 아예 다음 세대로 미뤘다.
그렇다고 오늘날 대한민국을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느라 고생이 많았을 우리 아버지 세대를 싸잡아서 게으름뱅이고 나태했다고 몰아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제 이 일은 고스란히 우리 세대가 떠맡고 말았다. 다음 세대로 넘길 일이 아니다. 각 세대는 각 세대가 떠맡아야할 역사적 책무가 있다. 세상에는 원하건 원하지 않건 운명적인 책무라는 것이 있다. 바로 자주평화통일을 이루어 내야하는 일이다.
평화는 모든 가치에 우선하고, 평화를 지키는 것이 어떤 무엇보다도 생산적인 활동이며, 평화는 아름답고, 평화는 언제나 옳다. 평화는 자주적인 힘으로 지켜낼 때 그 가치가 극대화된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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