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한잔 들고 주유천하
Newsroh=이계선 칼럼니스트
“요즘 돌섬통신이 뜸해졌습니다. 파킨슨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신건 아닌가? 걱정하는데 뒤늦게 돌섬통신이 날라오면 여간 반가운게 아닙니다.”
“글쓰기가 점점 힘들어요. 얼마 전부터는 ‘이번이 마지막으로 쓰는 돌섬통신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하면서 쓴답니다.”
“돌섬통신이 끊어지면 안 되지요. 그러면 돌섬바닷가는 쓸쓸해질테고 황금알이 주렁주렁 열리는 장난감농장 ‘에덴’도 폐농이 될테니까요."
나도 그렇게 되는줄 알았다. 폐업신고를 한 카폐는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다. 작가가 글을 쓰지 않으면 독자들은 기억해주지 않는다. 20대에 명문대교수가 된 마광수는 40여권의 책을 낸 천재작가였다. 은퇴후 글을 쓰지 않으매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았다. 돈도 명예도 독자들도 모두 떠나가 버렸다. 얼마전 그는 스스로 목을 매어 생을 마감했다. 난 금년부터 제대로 글이 써지지 않는다. 유명 작가가 아니니 기억해줄 독자들도 없다. 홀로 돌섬 바닷가를 걷고 있으면 절로 ‘클레멘타인’이 나온다.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한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애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늙은 수부(水夫)가 된 기분이다. 홀로 홀로 나 홀로 이 넓은 바다에 나 홀로! 그래도 아내가 있지? 늙은 아내 혼자 기다리고 있는 아파트로 발길을 돌린다.
깔깔대는 예쁜 목소리들이 거실에서 새어나온다. 맨해튼의 미녀 7선녀들이 ·돌섬을 방문한것이다. 시집간 딸들처럼 친정엄마! 친정아빠! 부르면서...
글을 안 쓰니 독자들이 찾아온다. 찾아오면 친구가 돼버린다. 금년은 어느해 보다 방문객이 많다. 나는 알았다. 문학의 종착역은 우정인것을. 정말 아름다운 작품은 글이 아니라 우정으로 이어지는 풍류(風流)인것을.
사색당쟁으로 망해가던 이조시절 5명의 기인들이 모였다. 미녀시인 황진이, 학자 화담서경덕, 제갈량에 버금가는 토정이지함,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불력을 뛰어넘는 갓바치병해대사, 조선의 항우로 소문난 천하장사 임꺽정, 이들은 분야별로 5천년 조선역사상 최고의 인물들이다.
도원결의를 하여 나라를 구하자고 모인게 아니다. 술한잔에 시한수를 읊으면서 주유천하(周遊天下)를 즐기는 팔도유람을 떠나려고 만난 것이었다. 술통을 지고 앞장서 걷던 임꺽정이 심통을 부렸다.
“우리가 제주도로 풍류길을 떠날게 아니라 한양으로 쳐들어가 썩어 문들어진 정부를 들러엎어 버립시다. 여기 다섯분이 뭉치면 조선이 아니라 중국의 중원까지 정복할만한 영웅호걸들이 아닙니까?”
화담이 말렸다.
“민족이나 개인이나 격어야 하는 운명이 있는걸세. 앞으로 20년안으로 왜란이 일어나 조선팔도가 폐허가 될거야. 삼국지의 영웅들이 모두모여도 해결할수 없는게 우리민족의 운명이라네. 그래서 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아름다운 조국의 산하를 가슴에 담아두려고 이 길을 떠나는 걸세.”
산을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고 강을 만나면 흐르는 강물에 시한수를 띄워 보냈다. 아산을 지나는데 전쟁놀이를 하는 꼬맹이들을 만났다. 길 가운데 성채를 쌓아놓고 목검을 휘두르는 꼬마대장이 볼만했다.
“얘야, 이분들은 한양에서 내려오신 귀한분들이다. 전쟁놀이 중단하고 길을 비켜라.”
임꺽정이 타이르자 꼬마대장이 칼(막대기)을 빼들었다.
“무엄한지고! 성을 만나면 사람이 성(城)을 피해가야지 성이 사람을 피해가라니? 여봐라, 당장 저 무도한 놈의 목을 베거라.”
화가 난 임꺽정이 떡두꺼비 같은 손으로 꼬마대장을 웅켜잡아 어깨위로 올려놓았다. 마당발로 장난감성을 걷어 차 버리려고 하는데 토정이 말렸다.
“대장님 말씀이 맞네. 사람이 성을 피해가야지 성이 사람을 피해가는 법은 없으니까. 그런데 꼬마야 네 이름이 뭐냐?”
“이자 순자 신자 이순신이라 합니다.”
이번에는 갓바치가 중얼거렸다.
“이순신....음, 장차 나라를 구할 장군이 되겠구나”
5인의 팔도유람은 단순한 술타령이 아니었다. 조국순례요 인물찾기였다. 유람이 끝나자 5인은 흩어진다. 임꺽정은 청석골로 들어가 도둑왕국을 세운다. 화담은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황진이는 최고의 시인이 된다. 갓바치는 안성칠장사에 들어가 병해대사가 된다. 토정은 아산만 언덕빼기에 움집(土亭)을 짓고 두더지처럼 틀어박혀 토정비결을 완성한다. 7년 임진왜란이 왔지만 조선은 이순신이 있어 살아남는다. 대신 망한건 일본과 명나라였다. 조선침공에 지친 풍신수길(豐臣秀吉)은 덕천가강(德川家康)에게 나라를 빼앗긴다. 조선을 돕다 쇠약해진 명나라는 청에 망했다.
한국문학사에 제일가는 작품으로 홍명희의 ‘임꺽정’을 꼽는다. 중학교때 삼국지를 열번 읽은 나는 전두환정권때 금서(禁書)임꺽정을 세번 읽었다. 임꺽정의 무예보다 그의 승승뻘이 되는 화담 갓바치 토정 황진이의 풍류우정담이 멋지기 때문이다.
“돌섬을 청석골처럼 만들자.”
청석골에 영웅호걸들이 몰려오듯 동서의 강호제현들이 돌섬을 찾았다. 황진이의 팔도유람단을 만들자. 그런데 5년전에 덜컥 파킨슨병에 걸렸다. 섬 밖으로 나갈수 없는 돌섬감옥의 무기수가 돼 버린것이다. 그래도 유람단을 꾸몄다. 단원은 단 1명. 술통 대신에 커피한잔. 매일 커피한잔 들고 돌섬을 돌다보면 좌경천리 돌섬만리가 이뤄지겠지.
커피잔 2/3분량의 납작한 꿀병에 내가 만든 특제커피를 채운다. 시실리섬 출신의 마피아두목들이 즐겨 마시는 이태리커피다. 어찌나 독한지 반모금만 마셔도 커피향에 취해버린다.
농장에 들린다. 은사시나무 꼭대기에 로빈이 앉아있다. 파란꼬랑지를 지휘봉처럼 까딱거리며 노래하는게 귀여워 한 모금 마시고 2절까지 감상. 바다로 가는 길에 숲을 지난다. 가로지르는 포장도로 말고도 오솔길들이 거미줄처럼 기어 다닌다. 숲속인데도 바닷가보다 시원하다. 숲에서 뿜어 나오는 산소가 파도를 타고 올라오는 오존보다 더 싱싱하기 때문이다. 바람이 아름다워 또 커피 한모금 꼴깍. 노란해맞이꽃 위로 호랑나비가 떼로 몰려든다. 김흥국의 ‘호랑나비’가 생각나서 또 한모금. 바닷가로 나가 모래를 밟으면서 파도와 대화하려고 한 모금. 아니다! 술통이 바닥 나버렸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까닭도 않는데/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이육사
기분은 그럴듯한데 몸은 천근만근 비틀비틀. 그래도 집으로 돌아가는 반환점이 반갑다. 바다로 가는길은 숲과 모래사장과 새소리 꽃웃음과 어울리느라 2시간. 돌아갈때는 일직선으로 뚤린 보드워크라서 50분이다. 비단길보다 아름다운 20리 보드워크에 들어서면 하늘문이 열린듯 세상이 아름답다. 삼장법사를 따라 서천서역국으로 걸어가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처럼 득도라도 한기분이다.
“황진이의 팔도유람처럼 고담준론은 없어요. 그래도 고향시절의 곤충채집 식물채집처럼 커피한잔 들고 떠나는 돌섬의 주유천하(周遊天下)가 마냥 즐겁답니다.”
만세! 비단길 보다 아름다운 돌섬보드워크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등촌의 사랑방 이야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sarangb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