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젠하워의 미국 처음이자 마지막 이스라엘 반대
Newsroh=김태환 칼럼니스트
정글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아프리카 밀림에서는 힘센 놈이 약한 놈을 잡아먹는다. 표범 두 마리와 여우 한 마리가 얼룩말을 에워싸자 멀리서 서로 왕좌를 두고 으르렁대던 두 마리의 사자가 나섰다.
“야 저 고얀놈들 좀 봐, 어르신께 신고도 안하고 맘대로 놀고 있네, 우리가 싸우지만 말고 먼저 버릇없는 놈들 군기부터 잡아야겠어.”
“암, 그래야지, 그래야 이 동네 (밀림) 에서 우리의 영(令) 이 바로 서지.”
두 마리의 사자는 언제 싸웠냐는듯 다정히 어깨를 맞대고 표범과 여우에게로 다가가 전매특허인 사자후(獅子吼) 를 내뿜었다. 얼룩말을 에워싼 무리들이 걸음아 날 살려라, 삼십육계 (三十六計) 줄행랑을 놓았다.
이와 똑같은 정글의 법칙이 국제사회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 때는 1956년, 장소는 이집트, 침략자들은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 이 사태를 '수에즈 위기'(Suez Crisis of 1956) 라 부르며, 미국과 쏘련이 그들의 무력 침공을 단호한 조치를 취해 물러나게 했다.
사태 배경과 해결 과정을 간략히 설명하기에 앞서 국제사회에서는 상식이 통하지 않고 오직 밀림의 법칙과 같은 힘의 논리와 각국이 처한 상황 하에서의 국익이 지배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집트 상황
세계문명의 발상지의 하나인 이집트는 그 위세를 계속 유지하지 못하고, 외세의 침탈로 근대에 터키의 일부로 있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의 식민지 내지 점령지로 전락해 있었다. 피라미드와 같은 고대 건축물로 유명한 이집트는 또한 유럽에서 아시아로 통하는 지름길같은 항로를 제공해주는 수에즈 운하가 프랑스 외교관/사업가 레셉스(Ferdinand de Lesseps) 의 집념의 결과로 개통되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야 하는 시간과 경비를 절감해 동서 교역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오대양 육대주에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경영하는 대영제국에 수에즈 운하 지배는 매우 중요했다.
영국 영향하의 이집트에서 1952년 허수아비 왕정을 나기브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2년 뒤에 (1954) 나세르 중령이 나기브를 밀어내고 실권을 잡았다. 그는 낙후(落後)한 이집트의 근대화를 신속히 달성하려는 방안중 하나로, 나일 강에 거대한 댐을 건설해 농경지에 용수를 공급하고, 수력 발전으로 전력을 공급하며, 해마다 일어나는 홍수를 조절할 계획을 세웠다. 아스완 하이 댐(Aswan High Dam) 건설 자금 조달을 위해 세계은행(World Bank) 에 차관 신청을 했다 (1955.12.16.)
그런데, 미국이 사실상 세계 은행을 지배하고 있어서, 나세르가 당시 ‘중공’을 승인한 사실 때문에 그를 용공으로 여겨서 차관 신청이 거부되었다. 나세르는 양대 진영 어느 한 쪽에 기울이지 않고 양쪽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작정이었으나, 세계를 친공, 반공 이분법으로만 보는 미국은 그 중간에 인도네시아가 주동이 된 비동맹국가(Non-Aligned Countries) 들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집트가 미국에 2천8백만불어치 무기(중형 탱크, B-26 폭격기등) 를 구매하려는 의사를 표명하자 덜레스 국무 장관은 “그 정도는 별것 아니네(Peanuts)” 라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요청을 거절했다. 나세르가 쏘련에 같은 액수의 무기 구입의사를 표명하자, 쏘련은 100대의 MiG 전투기, 탱크 200대 등 시가 약 9천만불에서 2억5천만불 상당의 무기를 보내면서 대금으로 이집트산 면화(Cotton)로 대신해도 좋다는 호조건을 제시했다.
이집트는 세계은행 차관 신청이 미국 때문에 좌절되자, 자기 땅에 개설된 수에즈 운하가 치외법권처럼 국제관리에 두는게 못마땅했고 또 앗완 댐 건설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였다. (1956.7.26.)
***국유화 이전 수에즈 운하는 “수에즈 운하 회사” 가 소유하고 운영했는데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가 지배했다.
프랑스 상황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상이 변했는데도 영국과 프랑스는 그들의 종전 식민지를 계속 유지하려 하였다. 프랑스는 월남의 식민 지배를 계속하려다 디엔 디엔푸에서 민족 독립군인 월맹군에 포위되어 항복함으로써 월남에서 손을 떼게 돠었다. 또한 지중해 건너편 아프리카 쪽에 알제리아를 식민지로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곳 원주민들이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세르 집권이후 알제리아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프랑스는 이집트와 적대 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에 많은 군사원조(미라지 전투기 등)을 제공하고 때가 오면 이집트에 본때를 보여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영국 상황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발표에 가장 놀라고 원상회복에 적극적 자세를 보인 인사는 영국 수상 이든(Eden) 이었다. 그는 같은 입장으로 생각한 프랑스의 몰레 수상(Guy Mollet) 과 협의하여 겉으로는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는 듯이 보이면서도 뒷전으로는, 사실상 무력 개입을 하여 운하의 현상을 국유화 이전으로 원상회복시키고, 나아가, 말썽꾼 나세르를 실권시킬 계획을 진행하였다.
이스라엘 참여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침공 시 군사 집결과 발진(發進) 기지로는 지중해의 말타(Malta) 였다. 운하까지 약 1,000 마일이나 떨어져 있어서 가까운 곳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다가 이집트와 적대 관련에 있고, 접경한 이스라엘을 음모에 끌어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프랑스가 적극 유인하여 이집트 침공에 가담케 하였고, 이스라엘은 이집트군이 쏘련에서 구입한 장비 사용에 익숙하기 전에 쳐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적극 호응했다.
미국의 입장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시 쏘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난하면서, 영-불의 이집트 무력 개입에 입을 다물고 모른척 할 수 없고, 잘못하면, 중동/아랍권을 모두 미국에 등을 돌리게 되므로, 영국과 프랑스에 무력개입을 못하도록 경고하였다.
무력 개입
삼국 동맹(Protocol of Sevres) 에 따라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군이 시나이 반도로 진격해서 이집트침공을 시작해는데, 바로 다음날 (10/30) 각본대로 영국과 프랑스가 공정한 제3자인척 이스라엘과 이집트에 교전을 중지하고 철수할 것을 최후통첩(Ultimatum) 형태로 발표했다. 그러나, 나세르가 이집트군은 원래 이집트 영토 안에 있는데 어디로 철수하라는 말이냐고 불응하자 영-불 양국은 이것을 구실로 (casus belli) 수에즈 운하 지역에 전폭기로 폭격을 개시하였다. (10/31) 그러자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안에 있는 모든 배 (40척)를 격침시켜 운하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전폭기들이 카이로 공항을 폭격하려 발진했으나 미국인들이 카이로 공항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를 받은 이든 영국 수상은 이들이 폭격으로 죽거나 다칠 경우 미국의 분노를 염려해 회항을 명령했다. 그러나, 공정대(空挺隊) 를 이용해 포트 사이드 항구와 수에즈 운하 지역을 영-불 연합국이 장악했다.
미-쏘의 개입
미국 -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미국이 무력 사용 불가를 천명했는데도 사전연락도 없이 실행한데 매우 불쾌하게 여기고 당장 철군할 것을 요구했다. 아이젠하워는 영국의 어려운 재정 형편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영국이 IMF 에 자국 지분을 인출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가장 큰 지분을 가진 미국이 비토권을 행사해 경제 제재를 하고 중동 국가들이 석유를 영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막았다.
쏘련 - 쏘련은 영국과 프랑스에 즉각적 철군을 요구하고, 그러지 않으면 런던과 파리에 핵 미사일 공격을 개시하고 이집트에 군대를 파견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집트에서 철군
애초에 영-불은 미국이 협조는 하지 않더라도, 방관(傍觀)해 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미국이 무력행동을 비난하고 경제제재까지 가한데다, 쏘련의 핵 공갈에 두 손 들고 12월 22일 철군을 완료했다.
이스라엘은 좀더 발을 질질 끌었지만 다음해 3월에 결국 철군을 완료했다. 이스라엘이 1948년에 건국하고 나서 미국이 이스라엘 편을 들지 않은 것은 아이젠하워가 최초이자 또한 최후일 것으로 보인다.
사태의 결과
나세르는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삼국의 침공을 받았으나 승자로, 또한 아랍의 권위를 세운 이집트 민족주의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이스라엘은 수에즈 운하 사용권을 따내지는 못했지만, 티란 해협 항행권(航行權)은 회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과 쏘련이라는 강대국 반열에 들지 못함을 수에즈 사태로 깨닫게 되고 중위급 강국에 만족해야했다. 그리고, 그들이 누린 중동에서의 영향력을 모두 잃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www.en.wikipedia.org
로즈벨트의 대영제국 와해작업, 아이크가 완결
한 가지 덧붙이고 싶는 것은 대영 제국의 해체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당시 미국 대통령 로즈벨트가 개시했다 (1941년 대서양 헌장(Atlantic Charter)에 민족자결(Self-Determination) 을 포함시켰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역시 수에즈 사태 때에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 제국주의 시대로 복귀하려는데 제동을 걸었다.
우연의 일치라고 보겠지만 아이크와 로즈벨트는 모두 홀랜드 이민 후예라는 점이다. 로즈벨트 가문은 뉴욕정착 홀랜드 계(New York Dutch) 이고 아이젠하워 가문은 펜실바니아에 정착한 홀랜드(Pennsylvanian Dutch) 계통이다. 뉴욕 지역은 원래 홀랜드사람들이 먼저 정착해서 처음에 뉴 암스테르담(New Amsterdam )이라 불렀으나, 영국 사람들이 땅을 뺐어서 이름을 뉴욕(New York) 으로 고쳤다. 뉴욕 주변에는 많은 지명이 홀랜드에서 유래하는데, 한인들이 많이 사는 플러싱(Flushing) 브롱스(Broncks = Bronx ) 타판지(Tappan Zee) 등 아주 많다.
로즈벨트, 대영제국에 모욕을 주다
말이 나온 김에 로즈벨트 대통령은 케네디 대통령의 부친(Joseph Kennedy, Sr.) 을 영국 주재 미국 대사로 보내서 영국(왕가)에 사실상 모욕을 주었다. 아시다시피 케네디 가는 아일랜드 계통이다. 일제 때 왜놈들이 우리를 (조선인 = 죠센진) 이라고 얕보고 깔본 것보다 영국인들이 몇십배 더 경멸하는 아이리쉬 후예를 대사로 보낸 것은 의도적으로 모욕을 주려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 이글은 현재 우리들이 쿠바 사태나, 수에즈 사태에 버금가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어서 역사를 통해 지혜를 배우자는 뜻에서 올린 것입니다. 오직 정글의 법칙만 적용되는 국제사회에서 동맹과 조약을 너무 믿어서는 안됩니다. 강대국들의 행동 양태를 알아둡시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태환의 한국현대사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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