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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이 뚜렷하진 않지만 언제 바꼈는지 바뀌는 건 틀림없다. 밤바람에 낙엽구르는 소리가 선잠을 깨운다. 아직도 여름인줄 알았는데 성큼 가을이 문턱에 와 있다. 하늘 끝에 닿았던 나무의 푸른 잎새가 듬성듬성 숱 없는 여인들 머리처럼 엉성해서 서글프다. 발끝에 부서지는 마른 잎을 밟으며 이 가을을 맞이한다.  

 

아무도 없는 썰렁한 공원의 벤취가 낙엽이불을 덮고 졸고 있는 것처럼 한가롭다. 쓸쓸하지만 그 벤취에 앉아보고싶어 손바닥으로 마른잎을 쓸어냈다. 바람에 휩쓸려가는 낙엽을 따라 내 마음도 묻어간다. 

 

어디로 어디까지 가는 것일까? 

 

붉은 나뭇잎 하나가 언제 내려앉았는지 사뿐 내 무릎 위에 앉아있다. 가기 싫어 쳐졌더냐? 다리아퍼 쉬었더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손에 집어 들었다. 혼자 있는 내가 외로워 보여 친구하려 했을까? 

 

연두빛 나풀나풀 어린잎을 자랑하던 때가 얼마 전이었다. 붉은옷 갈아입고 어느새 일생 다했다고 어딘지도 모를 마지막 갈 곳을 찾아 떠나가는 그 마른잎 하나가 나를 닮은것 같아 연민스러웠다. 왠지 그냥 버리면 안될 것 같아 손안에 꼭 쥐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일 모레면 내 사랑 언니가 하늘나라 가신지 일주년이 되는 날이다. 

 

가슴깊이 묻어두었던 사무친 그리움이 화산처럼 폭발하는 요즈음이다. 아이처럼 조카에게 그리움을 호소했던 며칠 전이었다. 핸드폰에 사진 한장이 들어왔다. 

 

아!--  열여덟살 하얗고 복성스러운 처녀때의 언니였다. 

 

“기왕이면 어머님 제일 예쁜 사진을 보내드려야죠..”

 

그 옛날 일본비단 하오리 천으로 만든 한복을 곱게입은 아가씨였다. 그래 생각난다. 엄마와 숙모 여동생까지 여자들만의 가족 사진을 찍던 날이었다. 선볼때 써야한다며 언니만 따로 독사진을 찍어 주었던 그것이었다. 

 

종로쪽 단골 포목점에서 천을 떠다가 엄마가 손수 만들어 입힌 새 옷 자랑삼아 찍은 가족사진을 생각해냈다. 

 

그 사진속 언니의 저고리 무늬가 손가락을 쫘악 편 것처럼 단풍잎이 그려져 있었다. 마치 손에 쥐고 온 단풍잎 하나가 언니가 보낸 전령처럼 생각되었다. 마냥 애잔하고 슬펐다. 

 

언니 얼굴을 본게 언제였더라. 아득하다. 정말 아득하게 너무 멀리왔다. 점점 더 멀리 멀리 가버려 먼지처럼 부서지는 영상. 열여덟살 언니가 조금은 낯설게 내 눈앞에 화사하기만 했다. 

 

언니와 헤어졌던 마지막 때도 낙엽을 밟았지. 설악산 고운 단풍철을 그만 놓쳐버렸다. 내장산 단풍을 보라고 관광티켓을 손에 쥐어준 딸 내외. 

 

나 잘 살겠다고 떨치고 온 이 어미보다 그들에겐 이모가 더 살가운 어머니였다. 서둘러 단풍여행 관광열차를 탔다. 느긋한 마음으로 오래 잊고살았던 고국의 산야를 감상하며 오손도손 정담을 나누려 기대했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는 어이없이 깨져버렸다. 

 

분위기가 술렁술렁 하다싶더니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한바탕 놀자는 판국임을 알았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고... 신나서 난리인데 너무 어리둥절 했다. 

 

마치 바로 세상이 끝나는 마지막 순간을 보는 것 처럼 난장판 아수라장이었다. 

 

현실에 찌들어 살다가 하루쯤 나사 풀고 놀아보자는 사람들에게 허용된 공간이었다. 내일을 바쁘게 또 살아가려니 재충전의 기회로 필요한 기회 였을까? 나중에 알고보니 칸마다 전부 그런게 아니고 한편에 한량만 따로 마련된 공간이라고 들었다. 그걸 미리 알지 못했던 우리가 그들 옆에서 외롭게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저렇게 재미나게 사는 사람들도 있네.” 

 

별세계 사람처럼 조용히 웃던 내 언니. 층층 시하에 시집살이로만 살아온 형편이니 당연한 의문이었다. 나와 성향이 다른 언니가 늘 어머니같이 푸근해서 너무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웠다. 설악산을 떠난 단풍이 연착을 하는지 내장산은 아직 붉게 물들지 않았다. 앞으로 삼 사일 후면 구경이 좋을꺼란 말을 들으며 많이 아쉬었다.

 

“너무 일찍왔어 미안해 어쩐대.” 

“언니가 단풍이 왜 미안헌데? 시간이 촉박한 나 때문이지.” 

 

우리는 그 날 중간지점 어느 산자락 앞에서 잠시 내렸다. 내장산에서의 아쉬움을 달래줄 빨강 꽃 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꿩대신 닭이라고 했던가. 

 

“와....우”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산 속으로 흩어졌다. 산 전체가 빨갛게 술에 취해 있었다. 너그럽게 웃으며 넓은 품안에 모두를 품어 주었다. 이 아름다운 강산에 내가 살았었구나. 감회가 새로웠다. 

 

무수히 발에 밟히는 마른잎들이 사그락거리며 우리 자매의 대화에 끼어 들어 추억에 수를 놓아주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벌써 그림자가 길다. 저녁짓는 연기일까? 아늑한 산 속에 숨어 앉은 파랑색 지붕에서 하얀 실타래같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너무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속에 우리가 서 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언니와 나. 자연이 만들어낸 멋진 조화가 너무 황홀했다. 이 행복한 순간에 갑자기 가슴에 무언가가 치미는가 싶더니 울컥 설음이 복바쳤다.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다음을 기약하고 떠나기엔 남은 세월이 너무 짧다. 언니와 나는 서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끈끈하게 혈육의 정이 묻어나는 눈물이었다. 

 

이 동생이 고국행 비행기를 타는 날이면 언니는 새처럼 몸이 가벼워진다고 들었다.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시간에 언니는 가락동에서 안산까지 달려오신다. 

 

지하철을 두 세번이나 바꿔 타신다던가. 팔십 노인이 복잡한 인파에 부대끼면서 집으로 오신다. 

 

내가 좋아하는 배추 겉절이 무쳐서 싸들고 한달음에 오시는 것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주변에 내 언니같은 자매는 없는것 같아 늘상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인 나. 

 

이제 고국행 나드리가 시들하다. 그 쪽 발걸음이 무뎌진 것은 반겨주던 언니가 안 계시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초록이 싱그러운 계절일 것이다. 어느 산 외로운 곳에서 나무와의 영원한 벗으로 고이 잠들어 계신 내 언니. 

 

여기 낙엽길을 홀로 걸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인생은 떨어지는 낙엽같다’라는 노래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 오는 듯 하다.

 

칼럼니스트  오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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