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Newsroh=김중산 칼럼니스트
갈 길은 먼데 해는 벌써 서산에 지고 있다
조선 후기의 중흥기를 이끈 개혁 군주로 높이 평가받는 정조가 1800년 8월 승하(昇遐)한 후부터 지금까지 218년 중 수구 봉건 세력이 조선을 다스렸고, 36년 간의 일제 식민통치를 거쳐 1945년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민주개혁 정치세력이 집권한 김대중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 참여정부 10년을 제외한 나머지 반세기 이상을 수구 냉전 세력이 나라를 지배했다. 멕시코 제도혁명당과 일본 자유민주당 그리고 당명을 바꿔가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자유한국당 같이 일단의 정치세력이 반세기 이상 장기집권하는 것은 세계 정당사상 드문 일이다.
지난 25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당원토론회에서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예거하면서 “이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고 지방선거에서 이겨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의 지론인 ‘20년 집권론’을 다시 꺼내 들었다. 이 대표는 “이번 기회를 우리가 놓치는 것은 상상도 할 수가 없다”며 “내후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둬 2022년 대선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준비를 지금부터 잘해나가기 위해 당 현대화 계획을 세워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이 대표는 다시 정권을 뺏겨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로 “10년을 집권해봤자 무너뜨리는 데는 불과 3~4년밖에 안 걸린다”며 “금강산과 개성이 무너지고, 복지정책도 무너졌다. 고작 10년 집권 후 바로 이명박에게 정권을 뺏겨 다 도루묵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대표가 당원토론회에서 ‘20년 집권론’을 다시 꺼낸 것은 당원들을 격려하고 전의를 다지기 위한 발언이라고 이해하지만 지금이 과연 그런 말을 공공연히 해도 좋을 때인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니 솔직히 듣기 거북하다. 교만하게 들린다.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후 노무현 대통령을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보낸 이 대표로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말을 아껴야 한다.
박근혜 탄핵 후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궤멸적 패배를 당해 지금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하고 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어쨌든 지난 반세기 이상을 지배해온 기득권 세력으로 만만하게 봐선 절대 안 된다. 보라. 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던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가 불과 몇 달도 안 돼 스멀스멀 바퀴벌레처럼 기어나와 다시 입방정을 떨고 있지 않은가. 정권을 잃고도 정신 못 차리고 초토화된 당의 당권을 쥐겠다고 친박 비박 계파 싸움이나 하는 한심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하는 비판에도 이따금 겸허하게 귀담아 들어야 할 것들이 분명 있다.
이해찬 대표의 ‘20년 집권론’에 대한 자유한국당 김병준 비대위원장의 따가운 비판이 좋은 예다. “할 일을 하면서 20년 집권을 하겠다면 이해가 되지만, 각종 개혁에 대해서는 개혁의 ‘개’자도 손 못 대면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꼬집은 것은 피멍이 들만큼 아프게 새겨 들어야 한다. 물론 개혁 못하게 발목 잡고 정권이 망하기 만을 바라는 야당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다.
얼마 전 여권 고위 관계자가 “여소야대 체제에서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이 개혁입법을 막고 있기 때문에 2020년 4월 총선까지는 아무것도 안 될 것 같다”며 하소연했다. 하지만 야당 탓만 한다고 여당의 책임이 경감되는 건 아니다. 야당과의 협치를 위해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노력했는지 돌아 봐야 한다. 잘하면 20년이 아니라 그 이상도 집권할 수 할 수 있겠지만 문재인 정부가 지금 하는 걸 보면 20년 집권은 커녕, 내후년 총선 걱정을 해야 할 판이다. 현 정부의 실정에 따른 민심 이반(離反)에 고무된 나머지 어느덧 “한번 해볼 만하다”는 말이 자유한국당에서 조심스럽게 흘러나오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2016년 4월 총선 당시 야당이 문재인과 안철수로 분열되어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의 압승이 예상됐지만 패배했듯 민주당도 자만하면 내후년 총선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집권 2년차에 벌써 ‘문재인 레임덕’이 시작됐다는 얘기가 나돌 만큼 민심이 흉흉하다. 그런데 대통령이 심상찮은 민심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 의문이다. 문 대통령은 국회시정연설에서 우리나라 경제성장률 지표가 좋다고 강조하면서 “세계가 우리의 경제 성장에 찬탄을 보내고 있다”고 한 대목 말이다. ‘이영자 현상’이란 신조어가 회자(膾炙)되고 다들 살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찬탄’이라니 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대통령의 현실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민생경제는 악화되고 남북관계마저 진전이 안 되고 있는 상황에서 집권 2년차에 접어든 여당 내에선 벌써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대선 후보 경선에서 문 대통령에 맞섰던 유력 주자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안희정에 이어 이재명이 위태롭다. 친문 핵심 김경수는 감싸면서 이재명은 탈당하라고 윽박지른다. 그 다음 타깃은 박원순이 될 것이란 말이 나돈다. 지금이 과연 친문과 비문이 미래권력을 두고 암투(暗鬪)를 벌일 때인가.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계속해서 떨어지는 와중에 집권당 대표가 서둘러 민심을 수습할 대책을 세우는 모습을 보이는 대신 20년 장기집권 운운하다니 오만하기 그지 없다. 그야말로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격이다.
요즘 민심과 동떨어진 청와대와 민주당의 행태를 보면 ‘갈 길은 먼데 무심한 해는 벌써 서산에 지고 있다’는 뜻의 ‘일모도원(日暮途遠)’이란 고사성어가 간단없이 떠올라 한숨만 절로 나온다. 지지율은 폭락하는 데 개혁입법은 손도 못대고 하릴없이 허송세월하면서도 야무지게 장기집권을 꿈꾸는 여당이나, 나라야 어찌 되든 말든 계파 싸움 속에 탁현민 ‘첫눈 타령’ 따위나 하며 사사건건 발목 잡고 늘어지는 야당이나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촛불이 꺼진 텅빈 광장에 다시 칠흑 같은 어둠만 남아 국민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민심은 천심이다. 조석변인 민심의 바다는 배를 띄울 수도 가라앉힐 수도 있다. 여야 모두 민심 무서운 줄 알고 제발 초심으로 돌아가 정치를 제대로 하라. 촛불혁명을 그새 잊었는가.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중산의 LA 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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