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설(萬年雪)의 맑고 푸른 정기, 새해 가슴에 품다
과연 뉴질랜드는 ‘길고 흰 구름의 나라’(Aotearoa)임이 분명했다.
지난해 말 나는 내게 신나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 아홉 곳’(New Zealand 9 Great Walks) 중 하나인 와이카레모아나 호수(Lake Waikaremoana)를 4박 5일 동안 걷겠다는 계획이었다. 예정일은 2019년 1월 8일(화)부터 12일(토)까지. 야심에 찬 새해 삶 설계도 내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등산용품점에 들러 든든한 등산화를 한 켤레 샀다. 신발 무게만 해도 2kg에 가까웠다. 그 밖에 이런저런 물품을 준비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데 DOC(Department of Conservation, 보존부: 뉴질랜드의 자연 보호를 책임지는 기관으로, 올레길 아홉 곳도 이곳에서 관리한다)에서 메일 한 통이 왔다. 최근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올레길 일부가 파손되어 부득이하게 입산을 금지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내가 예약한 산장(hut)에도 머물 수 없게 되었다.
원래 내 계획은 이랬다. 와이카레모아나 호수를 시작으로 한두 해 안에 ‘NZ 9 Great Walks’를 다 걸어보려고 했다. 책으로 펴낼 거니까 적어도 두 번씩은 걸어야지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런데 첫 도전부터 어긋났다. 덩달아 새해 계획도 엉망이 됐다. 심기가 불편하던 차에 뉴질랜드 정보 트램핑 클럽(대표: Gordon Lee)에서 통가리로 노던 서킷 첫날 산길(9.4km)을 무박일일로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새벽 6시 출발, 열한 명의 도보 여행자와 함께해
도보 여행을 시작한지 10여 분이나 지났을까. 저 멀리 나우루호에 산이 보였다.
1월 12일(토) 새벽 6시, 통가리로를 향해 떠났다. 동행한 트램퍼(tramper, 도보 여행자)는 운전자를 포함해 모두 12명. 대부분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다들 선잠으로 달랬다. 다섯 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눈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저 멀리 펼쳐진 눈(Snow) 산에서 뿜어낸 정기였다. 루아페후 산(Mt. Ruapehu 2,797m)이었다.
루아페후 정상에는 1년 내내 눈이 쌓여 있다. 뉴질랜드 겨울철(6월~8월) 스키장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 원주민인 마오리들에게는 영산(靈山)이다. 통가리로 노던 서킷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가리로 올레길의 출발지는 화카파파 마을(Whakapapa Village) 중심에 있는 정보센터(Information Centre)다. 올레길 여행에 앞서 꼭 들러서 날씨 같은 기본 정보를 확인하고 가는 게 좋다. 정보센터 옆에는 유서 깊은 샤토 통가리로 호텔(Chateau Tongariro Hotel)이 있다. 백 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 호텔은 ‘샤토’라는 말 그대로 ‘성’(城) 같이 느껴진다. 꼭 하루 이틀 잠을 자지 않더라도 고색창연한 커피숍에 앉아 피로를 푸는 것도 여행자가 누릴 수 있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초보 여행자에게 적당…총 19,000 걸음 걸어
산행 중 만난 작은 개울, 물소리에도 화산 냄새가 묻어 있었다.
11시 30분, 드디어 출발 시각이다. 기백 달러를 주고 산 등산화 끈을 바투 조였다. 오른손에는 등산용 지팡이를 꽉 쥐었다. 운전자를 뺀 11명의 도보 여행자들은 다들 조금은 마음이 설레는 것처럼 보였다. 뉴질랜드 북섬의 대표적 올레길인 통가리로 노던 서킷과의 첫 대면은 그렇게 시작됐다.
10여 분을 걷자 벌써 산길 여행의 맛이 전해져 왔다. 그런데 오클랜드 인근의 산길과는 다른 독특한 냄새였다. 바로 화산재 향기. 20여 년 전(1995년) 화산이 터졌을 때 나는 오클랜드에 살고 있었다. 그 당시 신문에 루아페후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해밀턴에도 화산재가 수십 센티미터나 쌓였다는 기사가 실렸다. 거대한 화산 폭발은 뉴질랜드는 물론 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통가리로 노던 서킷은 3박 4일을 일주하는 코스다. 화카파파 빌리지에서 시작해 다시 그곳으로 돌아오는 총 길이 45km. DOC가 도보 여행자들에게 알려주는 기본 여정은 이렇다.
첫날(Day 1) 4시간 9.4km, 둘째 날(Day 2) 5시간 12km, 셋째 날(Day 3) 3시간 8.1km, 마지막 넷째 날(Day 4) 5시간 45분 15.4km다. 걷기에 가장 좋은 기간은 10월 말에서 4월 말까지. 굳이 난이도로 따지면 중간(medium 혹은 intermediate) 정도, 그 ‘중간’이란 걸 설명하기는 모호하기는 하지만 아주 쉽지도, 심하게 어렵지도 않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첫날 걸어야 하는 9.4km는 높낮이가 그리 높지 않은 평범한 길이다. 초보 도보 여행자에게 적당한 코스다. 전에 완주한 사람들의 얘기에 따르면 나머지 여정도 그리 힘들지 않다고 한다. 활화산의 기운 속에 펼쳐진 통가리로 올레길의 코스는 90% 정도가 나무 한 그루 없는 수풀 길을 걷는다고 보면 된다.
DOC가 안내한 것보다 30분 정도 앞서 목적지 망가테포포(Mangatepopo)에 도착했다. 총 걸음 수는 19,000 정도. 내가 설정해 놓은 하루 목표 걸음 수보다 두 배나 많은 숫자였다.
태곳적 신비, 황량함의 아름다움 계속 펼쳐져
뉴질랜드 정보 트램핑 클럽이 마련한 이 날 도보 여행에 모두 11명이 함께 했다.
통가리로 노던 서킷의 첫날 도보 여행을 끝내면서 든 생각.
사실 조금은 밋밋한 길이었다. 숲이 아닌 수풀을 걸어서 그랬는지(‘수풀’이 줄어서 된 말이 ‘숲’이다) 자연의 웅장한 맛보다는 옆 마을의 소소한 맛을 느꼈을 뿐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뉴질랜드 북섬의 대표적 올레길이 왜 바로 통가리로 노던 서킷이 되었는지도 이해가 됐다. 태곳적 신비, 황량함의 아름다움 그 자체가 계속해 펼쳐져 있기 때문일 거라고 믿는다.
통가리로 노던 서킷은 뉴질랜드 북섬의 명산인 루아페후 산, 나우루호에 산(Mt. Ngauruhoe 2,291m), 통가리로 산(Mt. Tongariro 1,978m) 주위를 도는 코스로 짜여 있다. 통가리로 국립 공원(Tongariro National Park) 안에 있는 산들이다. 유네스코에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뉴질랜드의 보물이기도 하다.
산길을 걷다 깨달은 것 하나.
첫날 길은 유독 좁아 보였다. 주로 도랑 형식으로 만들어진 길이었다. 9.4km 전체 길의 50%가 그렇게 만들어져 있었다. 폭은 40cm 정도, 사람 둘이 동시에 걷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맞은 편에서 다른 도보 여행자가 오면 가던 길을 멈추거나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산길은 나 혼자 걷지만, 그 누가 다가오면 둘 중 하나는 꼭 양보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 내 인생은 내가 살지만 다른 인생이 내게 접근해오면 더러는 내 인생을 잠깐 비켜줘야 한다는 것.
통가리로 노던 서킷의 첫날은 내내 나우루호에 산을 오른쪽 옆으로 지켜보며 가게 되어 있다. 완벽한 조개 모양을 한 이 산은 마오리 전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전설 하나만 소개한다.
옛날 옛적 호랑이가 담배를 피우던 시절 나토로이랑이(Ngatoroirangi)라는 추장이 살았다. 그 추장이 나우루호에 산 정상을 올랐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추워 얼어 죽을 지경에 처했다. 추장은 여동생들에게 SOS를 보냈다. 그러자 여동생들이 불의 신(fire-demons)에게 부탁해 불기운으로 죽음 직전에 있던 추장을 살렸다. 추장은 고마움의 표시로 자신이 데리고 있던 여성 노예 아루호에(Auruhoe)을 제물로 바쳤다. 나우루호에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한 발 두 발 꾸준히 걷다 보면 정상에 오를 수 있어
뉴질랜드 위대한 올레길 아홉 곳 중 하나인 통가리로 노던 서킷을 무박일일로 다녀왔다. ‘천 리 길도 첫걸음부터’라는 말처럼 내가 품은 ‘NZ Great 9 Walks’ 등반의 첫걸음은 뗀 셈이다. 이 기세를 몰아 앞으로 계획대로 구름과 숲을 벗 삼아서 완주해 보려고 한다.
1953년 5월 29일 세계 최초로 지구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 경의 얘기다.
기자가 물었다.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를 수 있었나요?”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한 발 두 발 걸어서 올라갔지요.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이룰 때까지 합니다.”
2019년 새해가 시작됐다. 하루 이틀 또 살면 된다. 그렇게 꾸준히 살다 보면 그 무엇을 이룰 수 있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내게는 의미가 깊다. 이제 시작을 했으니, 이미 ‘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 아홉 곳’의 반은 걸었다고 본다. 나머지 반을 완성하기 위해 나는 한 발 두 발 걸음을 내디딜 것이다.
참, 이번 여행에 함께 한 도보 여행자들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덕분에 잘 다녀왔다. 특별히 한국에서 연수 목적으로 온 강원도청 서기관과 두 달 전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과 합류하기 위해 오클랜드에 온 내 친구(?)가 뉴질랜드의 멋진 자연을 맘껏 즐겼으면 좋겠다.
글과 사진_프리랜서 박성기
화카파파 빌리지 정보센터에서 사람들이 통가리로 국립 공원 안내를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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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 아홉 곳
<New Zealand 9 Great Walks>
▣ 북섬(North Island)
▷통가리로 노던 서킷(Tongariro Northern Circuit, 45km, 3~4일) ▷와이카레모아나 호수(Lake Waikaremoana. 46km, 3~4일) ▷왕가누이 저니(Whanganui Journey, 145km, 3~5일)
▣ 남섬(South Island)
▷아벨 태즈먼 해안 트랙(Able Tasman Coast Track, 60km, 3~5일) ▷히피 트랙(Heaphy Track, 78.4km, 4~6일) ▷루트번 트랙(Routeburn Track, 33km, 2~4일) ▷밀포드 트랙(Milford Track, 53.5km, 4일) ▷케플러 트랙(Kepler Track, 60km, 3~4일)
▣ 스튜어트 섬(Stewart Island)
▷라키우라 트랙(Rakiura Track, 32km, 3일)
총 길이 552.9km, 소요 기간 28일~39일
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 아홉 곳 웹사이트
www.doc.govt.nz/parks-and-recreation/things-to-do/walking-and-tramping/great-wal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