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부터 자연에 가까운 삶이었다. 소녀는 집 가까이의 금강을 보며 자랐고, 강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상상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염없이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소녀도 물이 된 느낌이었다.
화가 이명림(Yi Myung Rim)이 강을 보면 강이 되고, 꽃을 보면 꽃이 되었다는 상태를 이렇게 이해했다. 외부의 대상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아를 잊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고요한 상태에서의 비움과 집중일 뿐이라고. 그녀의 작업도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림 , 천문학, 그리고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몽상가였지만 정작 그녀가 대학에서 공부한 것은 사회학이다. 80년대의 혼란한 시대 상황은 그녀의 관심을 바깥 세계로 이끌었던 모양이다. 그림과 멀어져 시, 철학, 인류학, 사회학을 파고든, 의미있는 일탈의 시간이었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온 이유를 물으니 ‘물감 냄새’가 그리웠다고. 이명림은 91년, 그녀가 즐겨읽었던 프랑스의 시인, 폴 발레리, 랭보, 말라르메의 나라 프랑스로 유학을 왔다. 파리에서 이명림은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 작은 씨앗, 나뭇가지, 돌멩이와 같은 보잘 것 없는 재료들을 모아 설치 작품을 만들었다. 그녀는 더이상 쓸모를 잃은 쓰레기도 자신의 작품 안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좋았다고 말한다.
내내 수줍던 그녀가 돌연 생명을 주는 자로서의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내보이며 눈을 반짝일 때, 세상 언저리, 가장 하찮은 것들에 가 닿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녀의 초기 작품은 언뜻 보면 한계를 모르는 불필요한 생산과 소비에 대한 성찰과 비판을 담았던 누보 리얼리즘(신사실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업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전작에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것은 문명을 넘어선 보편적 가치, 생명과 평화이다. 그것은 사물의 세계라 해도 다르지 않다.
98년 퐁투아즈에 와서 한 작업들은 장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명림은 피사로, 세잔, 고갱 등이 그림을 그렸던 퐁투아즈에서 역시 강마을이었던 자신의 고향을 떠올렸고, 분주한 파리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호젓함에 젖었다. 물, 풀, 꽃, 빛, 바람, 구름 등 자연에 감각이 민감해졌고, 모네처럼 그녀도 나무와 꽃을 심는 데 심취했다. 2013-2014년 작, ‘예술과 영혼’은 빛의 화가, 모네와의 은밀한 교감이면서 수련 연작에 대한 이명림의 재해석이다.
슬럼프는 없었을까? 모든것이 상품화되어가는 사회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작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이 찾아왔을 땐 몇 년 간 붓을 놓아야 했다. 당시 이명림은 어린 딸이 축제처럼 하루에도 몇 장씩 그림 그리는 것을 물끄러미 관찰하는 것이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1998-2000년작 ‘미술의 역사 I, II’인데, 딸 한나의 작품을 추려서 구성한 것이다.
이명림은 먹, 세피아(오징어 먹물), 호두기름처럼 오래되고 자연적인 재료를 사용한다. 재료에 변화가 생기자 작품의 인상도 달라졌다. 세피아는 오래 되어 바랜, 낡은 종이 빛깔을 닮았다. 그 자체로 자연의 색이면서 이미 시간성을 담지하고 있는 색이라 할 만하다. 오래 전부터 서양화의 유화 재료로 쓰이던 호두 기름은 동양의 먹과 만나 명암과 번짐의 효과를 원활하게 해준다. 흔치 않은 재료의 조합이지만 이명림의 화폭 위에서 두 요소는 어떤 이질감도 없이 유연하게 스며들고 포개져, 그녀가 얼마나 많은 노동과 실험을 거쳐 이런 하모니에 이르렀는지를 종종 잊게 만든다. 검은 먹으로 칼을 사용해 그린 각조차 은은한 세피아의 그러데이션(gradation) 자장 아래 있으면, 또 주위의 곡선과 어우러질 때는 그 날섬을 좀처럼 눈치채기 힘들 정도이다. 그녀는 이 일련의 작품에 ‘교감’이라는 제목을 주었다.
그녀가 다루는 소재들은 구상과 추상 사이를 오가며, 구체적인 소재라 하더라도 고생대의 암모나이트처럼 고고학적이거나 땅속 뿌리 식물처럼 인간의 형상이나 뿌리, 혹은 기원을 연상시키는 것들이다.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 자연인데 인간의 형상을 닮은 것, 빛처럼 형체는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에 이명림은 확실히 끌리는 것 같다. 이런 화가에게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작업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종종 화폭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백이나 하얗게 비워둔 배경은 흡사 판화의 음각 같기도 한데, 그 오목새김이 돋을새김보다도 마음을 출렁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주도적인 먹빛 사이로 어슴푸레 스며나오는 이명림의 색은 모네의 것처럼 강렬하지도, 감각에 직접적으로 호소하지도 않지만 이상하다. 뭉근하게, 화사하다.
이명림은 이화여대에서 사회학을, Ecole des Beaux Art Versailles(1993-95)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1997년 Henri Chapu 미술관에서 초대 개인전 이후, 1998년 프랑스 문화성에서 마련한 Pontoise Cité Cézanne(세잔 마을)에 입주했다. 26년 간 13회의 개인전과 95회의 단체전에 참여했고 중국, 일본, 모스크바, 스페인, 벨기에, 이탈리아 등을 넘나들며 활발한 전시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République 역 근처, Impressions 갤러리(17 Rue Meslay, 75003 Paris)에서 이명림의 근작 45점이 전시 중이다. 기간은 2017년 4월 22일 - 5월 27일까지이며 갤러리는 수요일 18시- 21시, 토요일 14시- 20시 개방된다. 관람은 무료.
특별히 2017년 5월 6일, 17시에는 같은 갤러리에서 이명림의 전시회를 빛내줄 합동 콘서트도 열린다. 무용가 안제현의 춤, 시인이자 교수, 예술비평가인 Gil Alonso Mier의 시 낭송, 첼리스트 윤지원과 클래식 기타리스트 곽진규의 연주까지 다채로운 무대가 마련되어 있다. 참가비는 10유로. 콘서트 후에는 간단한 아페리티프가 제공된다. 이 공연은 2017년 ‘갤러리 음악회’를 통해 음악, 미술, 무용 등 경계 없는 문화예술의 장을 열어갈 음악협회 세실(대표 김혜영) 주관, 프랑스에서 한국 전통 창작무용의 멋과 아름다움을 알려온 울림(대표 안제현) 협찬이다.
문의 : myungrimyi@gmail.com /
Tel : 06 50 34 72 26
[한위클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