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턴불(Malcolm Turnbull) 정부가 호주의 기술이민 프로그램인 457 취업비자 제도를 폐지한다고 기습 발표하면서 취업을 통한 호주로의 이민 문호는 사실상 닫혀버렸다.
지난 1996년부터 호주 내 부족한 기술 인력을 해외 이민자로 충원하는 이 프로그램은 사실상 호주의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는, 한 축으로 작용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반면 이를 악용한 사례가 증가하고,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크게 위축된 경제 상황 속에서 실업률이 높아지자 해외 기술 인력이 현지인의 일자리를 차지한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컸던 게 사실이다.
턴불 정부는 취업비자의 전격 폐지 이유로 ‘자국민 일자리 우선’을 들었다. 전 세계적 경기 침체 속에서 원자재 수요 급감은 실업률 상승으로 이어졌고, 이는 소비 감소와 인플레이션 증가를 막아 내수경기는 수년째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크게 낮아진 지지도로 인해 당내에서 리더십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입지가 좁아지자 턴불 수상이 당내 분위기를 전환하고, 자국 우선주의(속으로는 백인 우월주의)를 내거는 보수 세력의 이목을 끌고자 ‘해외인력 문호 차단’이라는 정치적 선택을 한 것임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은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묻혀버렸다.
사실, 지난해 7월 국민투표를 통해 영국민 과반수 이상이 브렉시트(Brexit)를 결정했을 때, 또 미국인들이 트럼프(Donald Trump)를 국가 지도자로 선택했을 때 호주 사회의 보수화 경향이 더욱 짙은 농도로 드러날 것임은 예견된 것이었다.
‘브렉시트’는 근래 수십 년 사이 지속돼온 전 세계 각 지역간 시장통합 흐름인 세계화에 제동을 건 ‘사건’이었다.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가장 먼저 시도된 유럽 통합은 신자유무역주의의 물살을 타고 빠르게 진행됐다. ‘세계화’라는 흐름, 그 상황에서의 유럽 통합은 다국적 기업, 화이트 컬러 전문직, 기존 부유층에 혜택을 가져왔지만 해외 자본과 인구 유입이 통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존 노동자 계층은 보다 저렴한 해외 인력에 일자리를 빼앗겼고 어려움은 가중되어 왔다.
장기적으로 유럽 연합에 남아 있는 것이 더 큰 이익이라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절반의 영국민들이 브렉시트를 결정한 배경은 이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미국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배타적 자국보호를 기치로 내건 트럼프에 보다 많은 유권자들이 표를 던진 것이다. 트럼프를 지지한 이들은 전통 백인계 미국인들이다. 값싼 해외 이민자들에게 자신들의 일자리가 잠식되는 것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던 이들이었다. 트럼프는 바로 이들의 등을 긁어준 것이다.
최근 턴불 정부가 내놓은 이민 정책도 이 같은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노동당조차 해외 취입인력을 타켓으로 자국내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취업비자의 전격 폐지와 함께 시민권 심사 강화 움직임, 여기에 보수파 정치인으로 꼽히는 자유민주당(Liberal Democratic Party)의 데이빗 레어언헴(David Leyonhjelm) 상원의원이 영주비자 소지자에 대한 복지혜택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호주가 자국민(시민권자)이 아닌 이들에게 상당한 복지혜택을 부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 같은 주장 역시 호주 내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낸 것임은 분명하다. 신백인우월주의로 이어지는 분위기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이 반전될 것임은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소수민족 이민자 그룹은 정부의 정치적 결정, 특히 이번과 같은 취업비자 폐지 및 영주권자에 대한 복지혜택 제한 주장 등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파워를 확대해 가는 길이다. 정치인은 유권자는 인종적 배경을 가리지 않는다. 투표권을 가진 이들이 많아지면 자연히 정치적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소수민족 그룹이 자체적으로 이런 힘을 확대하고 또한 타 이민자 그룹과 연대를 통해 이를 늘려가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김지환 기자 jhkim@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