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김 박사 인터뷰
뉴스로=노창현특파원 newsroh@gmail.com
“김재규장군은 복권(復權)되야 합니다.”
뉴욕에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추모제를 기해 ‘김재규장군 복권 청원운동’이 시작돼 비상한 관심이 일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저격(狙擊)한 김재규 전 부장이 사형이 집행된 5월 24일을 기해 플러싱에서 김재규 장군 추모제를 올리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벽에 ‘義士 김재규 將軍 追慕會’라는 현수막을 걸고 김재규 장군(예비역 중장)의 영정(影幀)과 조화(弔花)가 놓인 제단을 향해 김재규 장군과 10.26 거사에 동참한 박선호 박흥주 김태원 이기주 유성옥 등 5인을 기리는 묵념과 추모기도, 추모사, 분향 등의 의식을 25년째 지속하고 있다.
김재규 장군 추모제는 지난 92년 뉴욕에서 재야사학자 폴 김 박사를 비롯한 뜻있는 한인들이 ‘김재규 의사추모회’를 결성하면서부터다. 폴 김 박사는 93년부터는 10.26 기념행사도 개최하고 있다.
폴 김 박사는 “79년 10월 16일 촉발된 부마항쟁은 단순한 학생들의 데모가 아니라 시민들이 주도하는 민란이었다. 만일 10.26 거사(擧事)가 아니었으면 서울 인천 대구 등 5대도시로 항쟁이 확산돼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을 것이다. 김재규 장군은 유신독재(維新獨裁)의 탄압에 짓눌린 국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선물한 의인”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12.12이전엔 김재규 장군이 박정희 유신독재에 격렬히 반발하는 국민들의 엄청난 희생이 예상되는 상황을 막은 의로운 결단이라는 여론이 힘을 받으며 구명운동(救命運動)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신군부는 이듬해 군사법정을 통해 김재규 장군을 내란목적 살인죄로 몰았고 광주민주화항쟁을 군화발로 잔혹하게 진압한 바로 다음날 사형을 전격 집행했다.
김재규 장군에 대한 재평가는 1997년 정권교체후 공론화되기 시작했으나 보수정부 회귀후 다시 금단의 영역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이후 다시 정권교체를 이룬 것에 힘입어 추모회 인사들은 김재규 장군 복권을 이룰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본격적인 청원운동을 벌이게 됐다.
이들은 “12.12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짓밟은 전두환 소장의 군사법정이 비공개 졸속재판으로 김재규 장군을 사형시킨 것은 또하나의 사법살인이다. 이승만 정권이 대통령선거까지 나온 조봉암 당수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킨 것 이상의 폭거다”라고 규정했다.
이들은 “이제 문재인 정부하에서 10.26을 재평가하고 조봉암 당수가 복권되었듯이 김재규장군을 복권시켜 역사를 바로 세우고 김장군의 명예(名譽)도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폴 김 박사는 “세상 사람들이 김재규장군에 대해 모르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김재규장군은 박정희 밑에서 중앙정보부장을 하면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독재는 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고 야권인사와도 접촉하며 독재를 막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해왔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그가 군단장 시절부터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던 민족지도자 장준하 선생의 인품에 반해 극비리에 만남을 가졌다는 증언도 있다. 김재규 장군은 1973년 중장으로 예편(豫編)한 후 9대 국회의원을 거쳐 1974년 건설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장준하선생이 1975년 포천 약사봉에서 정보부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의문의 추락사를 한 이듬해 정보부장에 임명됐다. 하지만 그의 사고나 행동은 이전의 정보부장들과 판이했다. 장준하 선생의 유족을 은밀하게 도와주는가 하면 유신독재하에서 데모하는 학생들이 보호될 수 있도록 대학총장들에게 당부하기도 했다.
1977년 김대중 선생이 긴급조치위반으로 수감중 단식투쟁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서울대병원으로 옮기도록 했고 1979년 김영삼 총재가 국회에서 제명당했을 때 박정희가 구속을 지시했으나 김재규의 설득으로 철회(撤回)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유신철폐를 외치며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에 나서는 부마사태(부산마산 민주화항쟁)로 계엄령이 선포되자 긴급 기관장회의를 소집해 군인들이 절대로 국민들에게 총을 쏘도록 해서는 안된다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훗날 밝혀졌다.
폴 김 박사는 김재규 장군이 중동 건설붐을 일으킨 주역이라는 일화도 소개해 눈길을 끌었다. 김재규 장군은 국내 건설업계가 중동에 진출하기 시작한 1974년 건설부장관에 취임했다한 이래 직접 방문해 중동 개발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세계 경제는 오일쇼크로 크게 휘청거렸지만 자재와 인력의 동시수출이라는 중동 특수로 돌파구를 찾은 한국은 1977년엔 국가예산의 25%를 수주(受注)하며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는 등 수년간 최고의 경기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폴 김 박사는 “김재규 장군은 1976년 중정 부장이 됐을 때 동생 김항규가 운영하던 사업체가 공직 수행에 걸림돌이 된다며 손을 떼게 하고 어려운 나라살림에 보탬이 될 건설시장 조사를 하라고 사우디에 보내 건설 붐의 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김재규장군은 사우디 압둘 아지즈 국왕으로부터 공로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상 Newsroh.com DB
폴 김 박사는 “김재규 장군은 10.26거사로 무고하게 희생될뻔한 수많은 목숨들을 살린 의인일뿐만 아니라 청렴결백(淸廉潔白)한 공무원이었고 자유평등의 확고한 사상을 갖고 있었다. 장군이 가신지 37년 세월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10.26이 재평가받지 못하고 장군을 복권시키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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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김재규 진술
김재규 장군은 재판 내내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野獸)의 심정으로 유신(維新)의 심장을 쏘았고 계획적인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1심 최후변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김재규 최후 진술 자료사진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내가 거사를 안하면 틀림없이 부마항쟁이 5대도시로 확대돼서 4.19보다 더 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고 판단했다. 이승만은 물러날 줄 알았지만 박정희는 절대 물러날 성격이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 그는 "차지철이 '캄보디아에서 300만을 죽였는데 우리가 200만 명 못 죽이겠느냐고 했다. 박정희도 '옛날 최인규와 곽영주가 죽은 건 자기들이 발포 명령을 내렸기 때문인데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면 나를 총살시킬 사람이 누가 있느냐'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더 큰 희생을 막기위해서 거사를 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공판 과정에서 박선호가 박정희 대통령의 여자 문제를 말하려 하자 김재규가 이를 제지하는 일도 있었다. 김항규에 따르면 김재규는 법정에서 박선호 과장이 대통령의 사생활 얘기를 꺼내려 하자 제지하였다고 밝혔다. <자료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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