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조국순례 이야기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이튿날 일기는 화창했다. 나와 요하킴은 새벽 5시 반 숙소를 나와 도동항 방파제(防波堤)에 올랐다. 매표소에 가기 전 일출을 보기 위함이다. 수평선이 희붐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여러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6시 조금 지나자 수평선에 새빨간 불덩이가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내 조국에서 보는 일출은 미국에서 보는 것보다 더욱 장엄하고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나도 모르게 70년대 저항음악인 김민기가 작사하고 송창식이 부른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을 입속으로 흥얼거렸다.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누구의 머리위에 이글거리나
피맺힌 투쟁의 흐름 속에 고귀한 순결함을
얻은 우리위에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찬란한 선조의 문화 속에 고요히 기다려온
우리 민족 앞에
숨소리 점점 커져 맥박이 힘차게 뛴다.
이 땅에 순결하게 얽힌 겨레여
보라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우리가 간직함이 옳지 않겠나
우리는 일출의 감동을 뒤로하고 전날처럼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식사를 떼우고 매표소에 달려갔다. 여행시즌이 아니라 아침식사 하는 식당이 없었다. 매표소에는 벌써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오후 2~3시 출항하는 3편의 배 승선권을 구하기 위해 무려 8시간 전부터 줄을 선 것이다. 그나마 매표소 직원은 9시에야 출근한다. 이때부터 박필립 수녀의 ‘요하킴 구하기’ 작전 맹활약이 시작되었다. 수녀는 3곳 항구의 정보를 입수해 수시로 나에게 연락해 주었다. 도동항에 줄지은 여행객들은 직원이 나타나자 고성을 지르며 항의했다. 직원인들 기상악화로 결항한 책임을 어떻게 질 수 있는지 답답한 노릇이다. 더욱이 전날 배에 예약이 되어 있는 요하킴과 달리 나는 돌아가는 배편을 예약하지 않아 더욱 불리했다. 특히 추석 귀향객으로 항구는 몹시 분주했다. 한 시간 넘게 도동항에서 줄을 서 있는데 수녀에게 연락이 왔다. 도동항에서는 오늘 승선이 불가능하다며 저동항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곳에는 이미 여 선생이 기다리고 있으며 도동에서 출발하는 배보다는 작지만 가능할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마을버스로 급히 저동으로 옮겼다. 미리 줄지어 있던 여 선생에게 우리 신분증들을 건넸다. 우여곡절 속에 11시 경 승선권을 손에 쥐었다. 박 수녀와 여선생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입체적으로 활약한 덕분이었다. 박 수녀는 출항시간까지 시간이 여유가 있다며 며칠동안 바람으로 운항하지 못한 독도전망대 케이블카로 우리를 안내했다. 케이블카로 전망대에 올랐지만 전날과 달리 독도는 볼 수 없었다. 대신 주변의 빼어난 경치만 구경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나는 울릉도 여행에서 일본의 독도에 대한 야욕은 역사적으로 울릉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했다. 조선 초기부터 일본은 끊임없이 울릉도에 일본인들을 정착시키려 노력했고 특히 조선시대 울릉도 공도화 정책은 이들의 야욕을 더욱 부채질 했다. 이 같은 사실은 모든 문헌에 나타나고 있다. 특히 울릉도에 대한 자연과 지리적 연구는 최근까지도 오히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져 온 측면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국력이 쇠퇴해져 독도문제에 단호하지 못할 경우 장차 일본이 울릉도까지 분쟁지역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여태 사화산으로만 알려졌던 울릉도 성인봉이 1만9천 년 전부터 5천 년 전까지 활발한 폭발이 이루어진 지금도 살아있는 생화산이란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일반적으로 지열은 1Km 내려갈 때마다 섭씨 20~30℃도 정도씩 증가하는데 울릉도 지역은 한국지질 자원연구원 시추결과 1km 내려갈 때마다 100℃ 정도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울릉도 하부에 기존 마그마가 남아 있거나, 아니면 새로운 마그마가 형성되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로 언젠가는 폭발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백두산이 최종 분화한 것은 1900년대로 불과 백여 년 전이고 한라산은 11세기 초 최종 분화했다. 특히 경주 일대에는 활발한 지진대가 형성되어 있다. 한반도가 결코 화산과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원전정책도 이러한 지질학적 사실 위에서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고마운 박 수녀와 작별하고 여선생과 세 명이 점심식사를 위해 들린 저동 부둣가 식당에는 가수 이장희 조영남 등의 식후감과 사인이 전시되어 있는데 맛은 그저 그런 식당이었다. 우리가 탄 배는 저녁 7시경 포항항에 도착했다. 요하킴은 다음날 새벽 김해공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에 예약되어 있었다. 시간이 너무 빠듯해 걱정하는데 이번에는 여 선생이 해결사로 나섰다. 부산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해 포항까지 우리를 데리고 오게 한 것이다. 이렇듯 ‘요하킴 일병 구하기’ 작전은 선한 지향(志向)을 가진 사람들의 노력이 서로 좋게 작용하여 이루어진 결과였다. 나는 이들과 경주까지 동행한 후 그곳에서 작별했다. 경주의 트친이 꼭 만나고 싶다고 들러주기를 요청한 것이다. 이튿날 아침 여 선생으로부터 요하킴이 무사히 출국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가 한국에서 좋은 인상과 추억을 안고 갔으리라고 믿는다.
<계속>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b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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