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오늘 새벽에 선종하셨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받은 전화. 사촌동생이 알려온 숙모 님의 부음이었다. 나와 몇 살 차이는 있지만 같은 팔십줄의 숙모 조카 사이였다. 우리 가문에 시집와서 한 가족으로 칠 십 몇년을 살아내신 분이다.
오늘따라 새들의 지저귐이 유난스럽다. 활기찬 생명체의 움직임이 호흡을 멈추고 떠난 사람과 대비되는 묘한 기분에 빠져들게 했다.
오래 병석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어머니의 밥상을 거절하기 시작했다.
“네 년 밥은 이제 안 먹을란다.”
시집살이 지독하게도 치뤄낸 어머니였다. 늙으막엔 치매 증상까지 겹쳐서 사뭇 횡포를 했다.
일찍이 시집와서 시각장애로 힘든 시어머님을 대신해 아홉 살 개구쟁이 시동생을 아들처럼 돌보며 살아온 어머니다.
이제 작은 며느리를 보고싶은 뜻이라고 깨달은 어머니는 서둘러 삼촌 색시감을 물색했다. 손아랫 동서가 될 신부의 나이는 열일곱. 삼촌과는 제법 나이차가 있었다.
녹음이 우거진 계절.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6월쯤이었을까? 조금씩 더워지고 있 었다.
아버지는 늦둥이 동생을 신식결혼 시킨다고 특별히 신경을 쓰셨다. 하얀 치마저고리에 면사포를 쓴 신부옆에 까만 연미복의 신랑이 무척이나 멋스러웠다.
그 시절엔 정말로 파격적인 결혼식이었다.
예식이 끝나고 집으로 올 때 신부는 인력거를 탔다. 왠일인지 신부옆에 단발머리 계집애 나를 앉혔다. 예식장이 만리동 고개에 있었다. 언덕을 내려가는데 어깨가 으쓱했다. 누가 봐주기를 두리번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제일 먼저 할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집안 잔치보다 할머니의 뒷처리가 더 급했다.
음식 냄새보다 진하게 집안을 덮친건 할머니의 용변 냄새 였다. 그 날 할머니는 끝내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그리 기다렸던 새 며느리의 절도 못받고 벽에다 허배(虛拜)를 해야만 했다. 밥은커녕 얼굴도 보지 못한채 할머니는 두 어달 뒤에 돌아가셨다.
1945년. 해방을 코 앞에 둔 무렵이었다.
흰 소복차림으로 상주노릇을 흉내내느라 사람들 눈치만 살 피던 어린 새색시. 어른들이 곡(哭)을 할때마다 숙모를 지켜 보는게 너무 재미있었다.
어머니는 참 너그러운 맏동서였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언니집에서 커온 어린 동서를 딸같이 대했다.
명절때마다 언니와 나 숙모까지 설빔을 해 입히고 부엌에도 들이지 않았다. 삼자매처럼 고루 색을 맞춰 입혀놓고 느긋하게 만족해 했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어서들 나가 널이나 뛰어...”
아버지는 앞마당 빨랫줄 밑에 튼튼한 널까지 놓아주었다. 동네 처녀들이 다 모여들었다.
꼬마였던 나는 나풀거리는 치마자락을 움켜쥐고 신나게 널을 뛰는 그들이 부럽기만 했다. 내 몫은 언제나 널을 고정시키려는 한 가운데 자리였다. 거기 쪼그려앉아 하늘에 치솟듯 번갈아 오르내리는 언니들을 보느라 목만 아팠다.
열다섯살 언니는 숙모와 동무하기에 딱 좋았지만 맏딸답게 집안 일을 돕느라 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웃에 분가해 사는 새내기주부 숙모는 늘 심심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나를 제일먼저 반갑게 맞아주는 사람은 숙모였다.
우리둘이는 양지짝 툇마루에 걸터 앉아 공기놀이를 했다. 언니보다 잘 놀아주는 동무가 생겨 너무 좋았다.
어머니가 먼 발치에서 바라보며 가끔씩 혀를 차기도 했다.
“쯔쯔 저사람 언제 철들어 어른이 되려나 . . .”
숙모가 진짜 어른이 된건 첫번째 사촌동생이 태어난 뒤였다.
1.4 후퇴 당시. 삼촌은 나라를 지키러 제 2국민병에 차출되었다. 그 때 숙모는 둘째 애기를 임신한 만삭의 몸이었다. 출산을 앞둔 아내를 두고 떠나야하는 삼촌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너나없이 피난을 서둘러야했던 급박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런데 숙모가 안 가겠다고 버티었다. 몸도 무겁고 신랑도 옆에 없으니 얼마나 겁이 났을까? 아버지 어머니가 매일을 졸라도 농뒤에 혼자 숨어서 애기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부부싸움 끝에 가끔씩 큰집에 와서 투덜거리던 삼촌의 말이 떠올랐다.
“고가네 고집은 아무도 못 당해 요.”
고씨 숙모 고집에 번번히 져주고 투덜대던 말이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을... 시댁 어른들의 말을 끝까지 거역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매일밤 폭격으로 불바다를 이루는 전쟁통 피난지. 평택을 거쳐 온양까지 갔을 때. 종전소식이 들려왔다. 다행히 아이는 돌아오는 길목에서 태어났다. 그 핏덩이 동생을 내가 업고 다녔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사람을 업은게 아니었다. 그 물렁거리는 물체를 등에 업고 질질 흘러내리는 거 북함때문에 걸음을 걸을 수 없었던 불편함을...
결국은 젖 한모금 배불리 먹어보지도 못하고 그 아기는 두어달 버티다가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어찌 손 써볼 수 없는 전쟁통에 일곱살짜리 어린딸을 홍역으로 하늘나라 보낸 가족들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이었다.
그 무서운 폭격도 잘 피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냐고 목놓아 우시던 어머니. 이번에는 삼촌 볼 면목이 없어 어쩌냐고 더 많이 슬퍼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린생명 둘을 피난 지에서 잃었다.
숙모는 너무 어려서였을까? 새 생명을 잃고도 씩씩했다. 삼촌의 생사 확인이 급해서 그 쪽으로만 생각하기에 바빴다.
삼촌은 인정스럽고 아주 싹싹한 분이었다. 사업수완도 좋아서 숙모와 가족들은 고생 모르고 편히 살았다. 그런분이 왜 그리도 단명하셨는지 50대에 세상을 버렸다. 슬하에 사남 매를 두었으니 아직도 할일이 많이 남았는데...
숙모 홀로 산지가 사십년. 이제 자녀들 든든한 가정 일궈 모두가 잘 산다. 증손까지 사대(四代)가 한 집에 살며 장수를 누렸다.
요즘 세상에 드물게 보는 따뜻한 가정이었다. 시골에 집 짓고 백발 휘날리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사촌동생이 참 대견하다. 돌이켜보니 숙모는 그런대로 괜찮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된다.
어렸을 때부터 동무로 살아온 세 사람. 반년전에 언니가 먼저 떠나더니 숙모도 갔다. 내가 그런 나이에 와 있음에 문득 놀랜다.
인력거 함께 탔던 새색시. 그 날의 숙모를 그려보며 하늘을 쳐다본다. 파아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소담스럽다. 천사의 치마자락일까?
“놀이동무 숙모! 하늘나라 따뜻한 천사의 품에 폭 안기시길 빌께요."
칼럼니스트 오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