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조국순례 이야기
모진 세월 검게 타버린 흑산도 (4)
Newsroh=장기풍 칼럼니스트
구한말 일제 침탈에 항거하여 순국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1834~1907)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흑산도에 유배당했다. 그가 4년간 유배된 곳은 정약전 유배지 사리에서 소사리(잔모래미)를 거쳐 흑산도의 숨은 보석이라는 아름다운 샛개 해수욕장 부근 언덕의 천촌(淺村 여티미) 마을이다, 여티미라는 방언의 의미는 모르겠지만 천촌(淺村)이란 한문으로 바꾼 것을 보면 ‘얕은 마을‘이 아닌가 짐작된다. 마을주민은 천촌리는 오래전 형성된 마을로 4백년 이상 매년 구정에 열리는 당제는 흑산도의 전통문화라고 자랑했다. 산 중턱 당집에는 당할아버지 할머니 양위를 모시고 있으며 옆 암굴에는 산신을 모신다. 마을의 개신교회는 열심한 지역봉사에도 불구하고 교세는 미미하다. 미신과 관계없이 천촌리 당제는 이미 흑산도 문화행사로 자리 잡은 것이다. 여행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 따라서 나는 여행 전 가능한대로 지역에 대한 역사와 환경을 알아보려고 노력했다. 최익현 선생에 대해서는 역사시간에 배웠지만 오래전 일이라 다시 한 번 생애를 정리해보았다.
19세기 중엽 조선사회는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이에 항거하는 민중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 외부적으로도 제국주의 열강의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23세에 과거급제한 최익현은 30세에 신창(충남 아산) 현감으로 나갔으나 충청감사의 부당한 명령에 불복해 사직했다. 36세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란 중책을 맡아 이른바 무진소(戊辰疏)라 불리는 ‘시폐(時弊) 4조’를 올렸다. 당시 대원군은 무리한 경복궁 중건으로 원성이 높았다. 최익현의 무진소는 무리한 토목공사를 중단하고, 수탈을 금하며, 당백전을 혁파하고, 사문세(四門稅) 폐지를 주장하는 대원군과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언로가 막히고 국정이 어지럽던 때 무진소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켜 최익현이란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분의 선비정신은 최근 우리나라 현실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정신이다. 그는 민중의 호응을 받았지만 대원군 지시로 최익현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빗발치자 고종은 하는 수 없이 최익현을 파직했다. 그는 5년 후 다시 대원군 권력남용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대원군 위세가 등등해 감히 건드리는 사람이 없던 시절이다. 이때는 고종이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하던 때였다. 고종은 최익현 상소에 힘을 얻어 친정을 선포하고 대원군 궐내 출입을 금지시켰다. 대원군은 양주 땅으로 하야했다. 그러나 최익현은 부자를 이간시켜 천륜을 끊게 했다는 반대파의 비난에 부딪쳤다. 최익현이 다시 민씨 일족 전횡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내용이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에 위리안치형을 받았다. 그는 제주도 유배생활 3년을 계기로 관직을 청산하고 오로지 우국애민의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길을 걷게 된다. 지금으로 말하면 재야 민중운동 지도자가 된 것이다. 1876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꿇어앉았다. 받아들일 수 없다면 목을 치라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죽음을 각오한 그의 상소의 결과는 흑산도 유배였다. 흑산도 유배에서 풀려난 최익현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으나 일본인들이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역적들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항일척사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이 사건 후 고종이 그를 호조판서, 경기도 관찰사 등 요직에 임명했으나 모두 사퇴하고 오직 적폐청산과 일본배격을 주장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곧바로 을사 5적 처단과 조약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을 주장했다.
유배된 사람들의 이름과 사유가 적힌 유배자 명단비. 최익현의 사유는 '상소'로 돼 있다
그러나 을사늑약을 계기로 상소투쟁의 한계를 인식한 최익현은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했다. 그는 74세 때(1906년 6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결의한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정부의 16가지 만행을 조목조목 따지고 조선과 일본 동양평화를 위해 조선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태인읍을 무혈점령한 의병은 주민들 호응으로 조정과 일본 토벌군을 물리치며 순창을 거쳐 전남 곡성에 들어갔다. 천여 명의 의병은 소총 등 무기를 갖추어 전력이 증강되고 사기는 충천했다. 1906년 6월 의병은 남원 진입에 실패해 순창으로 퇴각했다. 얼마 후 전주와 남원의 관군들이 쳐들어오자 “왜군이라면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나 동포끼리 죽이는 것은 차마 할 수 없으니 물러가라.”고 했다. 관군의 총공격으로 의병은 괴멸상태에 빠졌다. 최익현은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니 모두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의병이 거의 해산했지만 임병찬 등 21명은 끝까지 남았다. 최익현은 이들과 순창객사로 몸을 피했다. 그는 동지들에게 “우리는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서로 포개어 죽으면 누구 시체인지 알 수 없으니 각자 이름을 벽에 붙이고 이름 밑에 정좌하라. 예를 행하고 조상을 뵈려 하니 모두 의관을 정제하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이 모두 행낭을 풀어 도포를 꺼내 입고 갓끈을 다시 매고 벽을 등지고 꿇어앉았다. 곧이어 추격해 온 관군의 총격으로 9명이 죽고 최익현 등 살아남은 12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피리총각 전설이 깃든 흑산도 진리당
1906년 6월 최익현은 일본인들에 의해 3년형을 받아 대마도에 감금되었다. 최익현은 “왜놈이 주는 음식은 먹지 않겠다.”며 단식투쟁했다. 그해 11월17일 그는 대마도에서 74세로 순국했다. 최익현 유해는 충청도 노성군 무동산에서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했으나 참배객이 끊이지 않자 일제는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강제 이장시켰다. 대한민국은 1962년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선생의 삶은 아직도 일본과 미국에 대한 식민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세력을 누리고 있는 현대에도 사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나는 선생의 생애를 되새기면서 천촌리를 찾았다. 그는 진리에서도 '일신당'이라는 서당을 세워 후학을 양성했다. 천촌리 지장암에는 "기봉강산 홍무일월(箕封江山 洪武日月)이란 그분이 직접 암각한 친필이 새겨져 있다. 내용은 ‘고조선 기자 씨가 세운 강산, 홍무(명나라 태조 연호)의 해와 달’, 즉 우리나라의 무궁함을 뜻하지만 이면에는 그 시대의 어쩔 수 없는 뿌리 깊은 사대정신이 보인다. 그러나 기자 씨가 세운 독립된 나라임을 강조한 의미는 크다. 바위 앞에는 면암 최익현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비록 바위 위에 새겨진 선생의 8글자와 유허비 외는 최익현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없지만 이 시대에 선생의 유지를 깊이 묵상한 것으로 천촌 마을을 찾은 보람은 있었다.
흑산도 진리앞 고목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마을에 도착한 공영버스는 친절하게도 코스에서 한참 이탈해서 나를 임종인 선생 댁에서 멀지 않은 흑산성당 앞에 내려주었다. 섬마을 버스는 재미있다. 승객의 양해도 없이 흘러간 노래들을 크게 틀어놓고 따라 부른다. 이날도 기사는 혼자 흥에 겨워 노래방처럼 뽕짝을 쉴 새 없이 불러댔다. 때때로 부근 관광지 해설도 해 관광버스에 탄 느낌이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미사에 참석하러 성당에 들어갔다. 임종인 선생 내외분이 반갑게 눈인사했다. 우리는 미사 후 함께 댁으로 향했다. 이날 저녁 나는 부인이 정갈하게 차려 준 식사를 염치없이 들고 밤늦게까지 임 선생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분의 향토사랑은 대단했다. 흑산도를 위한 일이면 도지사든 누구든 찾아다니며 민원을 제기했다. 80이 넘은 연세에 손수 밭을 가꾼다. 다음날 아침 임 선생은 나를 부두까지 전송했다. 진리 뒤편 산들은 대부분 임 선생이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분도 나의 여행길에서 맺은 소중한 인연이다. 멀어져가는 흑산도를 바라보면서 울창한 산으로 둘러싸인 ‘검은 산’ 흑산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향토사학자 임종인 선생 부부
*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빈무덤의 배낭여행기'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b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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