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훈의 ‘혼자서 지구한바퀴’ (6)
Newsroh=안정훈 칼럼니스트
2017년 3월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나갔다가 5월에 중국으로 삼국지 역사 유적 탐방 여행을 간다는 얘기를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이전부터 동창들이 일 년에 한 번씩 테마여행을 해왔는데 나는 사정이 여의치 않아 한번도 함께 가지 못했었다.
실크로드나 시베리아 횡단 등을 다녀온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부럽기만 했었다.
이번에는 나도 꼭 가고 싶어 간곡하게 끼워달라고 부탁했다.
일행들이 모두 동의하여 나와 다른 후배 한 명이 추가로 합류했다.
원래는 4명이었는데 인원이 늘어서 준비도 그만큼 많아졌다.
중국과 베트남에서 오래 살았던 후배가 계획을 맡았다.
그 후배는 탐방루트와 역사자료 그리고 준비물 리스트 등을 복사해서 바인더로 만들어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각자 같은 날짜로 출국과 귀국 편 항공기 티켓을 예매했다. 체크 리스트에 따라 준비물을 챙겼다.
그런데 갑자가 사드(THAAD) 사태가 터져서 한중 관계가 급속히 악화됐다.
중국이 자국민의 한국 행 관광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중국 내에서 혐한(嫌韓) 분위기가 고조 되면서 중국에 있는 한국 기업들이 문을 닫는 상황도 벌어졌다.
우리는 여행을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분위기도 나빴지만 중국 측의 오만하고 치졸한 대응에 화가 났었다.
예약했던 항공권을 취소했다. 대신 베트남이나 러시아를 가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나는 당시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5월에는 어린이날과 부처님오신 날이 끼어 있어서 10일 정도 황금연휴가 이어졌다.
모처럼 큰 맘 먹고 긴 휴가를 내고 들떠서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휴가를 반납하기 보다는 어디든 가기로 했다.
쿠바에서 버스로 개조된 차량
처음에는 인생의 로망이었던 쿠바나 인도를 생각했다.
그러나 로망은 로망일 뿐이었다. 나 혼자 떠나기엔 건강, 자신감, 경험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무엇보다도 두려웠다.
며칠을 그렇게 붕 떠서 지내다 영감처럼 떠오른 곳이 시베리아였다.
오래 전에 감명 깊게 4번씩이나 보았던 오마 샤리프 주연의 영화 닥터 지바고의 무대인 시베리아 횡단을 해보기로 했다.
그 때는 블라디보스톡이 핫한 여행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한국에서 비행기 타면 2-3시간 거리로 가깝다.
거기서 횡단 열차를 타고 러시아의 맨 서쪽 땅 상트 페테르부르크까지 가보기로 결정을 했다.
마음이 정해지자 바로 블라디보스톡 가는 편도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일단 블라디보스톡 - 하바롭스키 - 이르쿠츠크/바이칼 호수 - 모스크바 - 상트 페테스부르그에 도전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심한 감기 몸살에 걸려 2주 넘게 헤매고 있다. 출발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자신감이 급 하락했다.
65살이라는 나이도 나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게다가 혼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나라를 장기간 여행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지를 잘 알기에 걱정이 점점 커졌다.
그래서 후보 계획을 세웠다.
1. 몸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블라디보스톡에서 며칠 쉬며 놀며 하다 그냥 귀국.
2. 하바롭스키까지 가서 며칠 보내다 힘들면 비행기로 되돌아오기,
3. 이르쿠츠크/바이칼 호수까지 횡단열차 타고 가서 상태를 보고 비행기로 귀국.
4. 아니면 이르쿠츠크에서 열차나 항공편으로 몽골의 울란바토르까지 가서 쉬며 지내다가 귀국. 이 경우를 대비해서 출발을 며칠 앞두고 갑작스럽게 몽골 비자를 받아 두었다.
5. 횡단 열차가 힘들면 비행기로 모스크바나 상트 페테스부르그 까지 갔다가 귀국.
6. 원래 계획한대로 러시아 여행을 마치면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 삼국까지 돌아보고 귀국.
7. 만약 운이 따라주어서 몸 컨디션이 좋아 진다면 욕심을 내서 북유럽 4개국 혹은 발칸 몇개 나라까지 돌아보고 비행기로 귀국
2년 전에 여행 계획을 적어 둔 메모를 지금 다시 보니 세상에 이런 자신감 없는 어설픈 여행계획이 있나 싶다.
이건 여행 계획이 아니라 마치 비상시 철수(撤收) 계획 같았다.
어쨌든 나는 떠났다. 계획도 없고 준비도 없는 무대뽀 여행이 시작됐다.
바로 그 때 떠나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떠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 생애 마지막 기회라고 믿었다.
그냥 내 오랜 꿈을 따라 저질 체력의 한계점까지 가보기로 한 것이다.
미얀마 인레호수에서
다행히도 나는 잘 짜인 일정을 따라 가는 여행을 싫어하는 스타일이라서 엉성한 계획임에도 별로 걱정 같은 건 없었다.
상황에 따라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진정한 자유 여행을 원했기에 별로 고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마음 내키는대로 여유있게 천천히 가는데까지 가보자고 떠났다.
삼국지 유적 탐방은 날아가 버렸지만 시베리아를 갔고 20개월의 긴 세계 일주까지 했으니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된 셈이다.
당시 복잡한 심정으로 불안했던 나에게 나짐 히크메트의 시는 도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후배가 카톡으로 보내준 "진정한 여행"이라는 시는 정말 큰 힘이 되었다.
그릇이 큰 후배의 격려와 배려가 고마웠다.
진정한 여행 - 나짐 히크메트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안정훈의 혼자서 지구한바퀴’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an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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