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하 지사는 일제에 맞서다 위험에 처하자 만주와 러시아로 갔고, 우여곡절 끝에 1919년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 및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인 ‘재법한국민회’ 결성에 참여했다. 그는 1920년 9월 독립운동가 황기환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6천 프랑)을 전달하는 등 우리나라 독립에 힘을 보탰다. 1920년에는 프랑스에서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열었다고 한다. 하지만 홍재하 지사는 1960년 콜롱브 자택에서 평생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홍재하 지사는 해방이 되면 가족 모두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꿈을 갖고 살았다고 하며, 해방 뒤에는 해마다 8.15 광복절에 집에 태극기를 달았다고 한다.
우리 정부는 2019년 8월 15일 홍재하 지사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했고, 지난해 11월 지사의 유해가 마침내 한국으로 봉환되었다.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고국의 땅에 묻혔다.
그는 프랑스인과 결혼해 슬하에 3녀 2남을 두었는데, 지금은 막내 아들인, 쟝 쟉크 홍 퓌안 씨만 생존해 있다. 그가 기억하는 아버지, 홍재하 지사 이야기를 듣기 위해 프랑스 부르타뉴, 생 뷔리유 Saint-Brieuc 로 갔다.
그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공교롭게도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서재를 정리 중이라고 하면서, 홍 지사의 사진과 한국으로부터 받은 훈장 등이 거실 뷔페 위에 놓여져 있었다. 인자한 미소로 우리는 반겨주던 쟝 쟉크 씨는 먼저 서류철들을 몇 개 들고 나온다.
거기에는 홍재하 지사의 자료인, 빛 바랜 옛 문서와 편지들, 오래된 한국 신문 기사 스크랩 그리고 사진들이 있었다. 장 쟉크 씨는 원본은 국사편찬 위원회에 기증하고 사본이라고 한다. 그것만 보는데도 전율이 일었다.
그 시절 먼 외국,프랑스에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며 동지들과 주고 받은 편지 및 대사관 모임에 갔다가 노트 해 놓은 것들이 있었다. 한자와 한글이 섞인 편지들이 시간의 흔적으로 빛 바래지고, 어떤 것들은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들도 있었다. 또한 홍재하 지사가 다른 한국인 두 사람과 함께 찍은 사진이 인상적이어서 사진에 대해 물었다. 이에 장 쟉크 씨는 세 분이서, 죽는 날까지 함께 하자며 손에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고 한다. 함께 프랑스에서 독립 운동을 했던 분들이라고 한다. 독립 운동의 흔적이자, 유럽 및 프랑스 한인 사회의 원조인 귀한 자료들이었다.쟝 쟉크 홍 퓌안 씨는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 감정이 격해져서 눈시울을 붉혔다.
자료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자료들을 모아서 가지고 계신가요 ?
-누나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자료들을 챙겨서 가지고 있던 것을 나중에 저에게 주었어요. 저는 누나 두 분과 형 한 분이 있었는데, 모두 돌아가시고 지금 저만 남았어요. 원래는 6명이었는데, 한 명은 18개월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아버지가 한국을 떠났을 때는 일본에게 쫓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중국인 신분증을 만들어서 일본인들을 피할 수 있었던 거에요, 그래서 퓌안FUAN이라는 중국 성이 생겼어요. 그리고 홍이라는 한국 성을 잊지 않기 위해서 저희들 이름 뒤에 홍을 붙여서 출생 신고를 한거에요. 그래서 제 이름이 Jean Jacques Hong Fuan 이에요.
아버님은 어떻게 프랑스에 오시게 된거에요 ?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 군대로 갔는데, 한국인들 500명이 러시아 군대에 있었어요.그리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더이상 한국인들이 필요 없었던거에요.그래서 러시아가 영국에 한국인을 받아줄 수 있냐고 해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그로 갔는데, 당시 영국인들이 일본과 관계가 좋았어요. 그래서 일본에게 연락을 한거죠. 500명의 한국인을 받아들이겠냐고요. 일본은 바로 그러겠다고 했죠. 그래서 일본이 점령해 있던 중국 쪽으로 가게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다행히도 그때 프랑스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 위원이었던 황기환 지사가 프랑스 정부에게 우리 한국인을 받아 달라고 요청을 했죠. 처음에는 거부했어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황 지사는 새로이 요청을 했고, 프랑스 정부는 35명을 받겠다고 했어요. 아버지 포함 35명의 한국인이 프랑스 동쪽 지역인 쉬프 (Suippes) 오게 되었어요. 거기는 1차 세계대전때 치열한 격전지여서 사망자가 많았어요. 35명의 한국인들은 격전지를 정리하고 재건하는 일을 하게 되었어요. 한국기자와 함께 아버지가 당시살던 곳에 가볼 기회가 있었어요. 지금은 군사 캠프가 되어 있는데요, 당시 거기에는 물도 전기도 난방도 되지 않은 열악한 환경이었어요. 그래도 그때 받은 일당 5프랑 중, 3,5프랑은 생활하는데 쓰고, 나머지 1,5프랑을 한국인들과 함께 모아서 한국 독립을 위해 보냈어요. 다른 34명의 한국인들은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찾아보았는데요 행방을 알 수 없었어요.
작년 11월에 아버님 유해가 한국으로 봉환되었죠.어떠셨어요 ?
-화장을 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일이었는데요, 많이 힘들었어요. 196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1974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아버지 위에 묻혀 계셨어요. 아버지,어머니의 관은 없어지고, 땅을 파서 아버지 뼈를 수색하는 작업을 하는데,아버지의 남아있는 몸(뼈)을 보는 것이어서많이 슬프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가는건 아버지가 무척이나 원했던 것이었기에 그게 저의 고통을 덮어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프랑스에서의 삶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기에 많이 힘들어 하셨어요. 꼭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갈거라면서 저희들에게 일부러 한국말을 가르치지 않으셨어요. 당연히 한국 가서 배울거라면서요.
아버지는 어떤분이셨어요 ?
-좋은 아버지였어요. 매우 엄격했어요. 그리고 한국 문화대로 우리를 가르치기를 원하셨어요.아버지가 가장이기에 어떠한 대항할 수 없었고요. 예의범절을 중요시 여기셨어요.그리고 사람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셨죠. 예를 들면, 식사할 때 어머니가 식사 자리에 앉으실 때까지 먼저 먹으면 안되었고요, 음식을 남기지 않아야했고, 똑 바로 앉아서 깨끗이 먹어야 했어요. 그리고 누나들이 농구를 했는데요, 어느 날 아버지가 농구 대회를 보러 갔어요. 농구 대회가 열리는 곳에 아버지가 갔는데 누나들이 짧은 바지를 입고 농구하는 것을 보신거에요. 순간 누나들은 집으로 바로 귀가해야 했고, 농구 경기를 마칠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누나들이 친구들과 놀러나가면 저녁 10시까지 들어와야 했어요. 만약 늦으면 아버지께 크게 혼났죠. 그리고 형과 저, 아들들에게는 누나들에게 보다는 덜 엄격하셨어요.하지만 아버지에게 대든다거나 하는건 용납이 안되었어요. 당시 프랑스 친구 부모님의교육과는 달라서 이해하지 못했는데요, 지금 생각해보니 가치들을, 즉 제대로 행동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신거더라고요. 그리고 우리에게 항상 상대에 대한 존중과 연대를 가르치셨어요.
아버지는 베푸시는 분이셨어요. 생전에 계실 때 우리 집은 한국인들이 끊이지 않았어요. 당시 한국인들이 파리에 오면 저희 집에 머물렀어요. 넉넉치 않았는데도 한국인들을 맞이했어요. 저희 집에서 먹고 자고 했었어요. 한국인 어떤 화가는 2년 동안 우리 집에서 지냈어요.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어요. 어머니는 그걸 좋은 마음으로 다 감당하셨어요.
그리고 어느날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집에 왔어요. 그는 파리의 호텔에 묵고 있으면서 거의 매일 저희 집에 왔어요. 형님이 파리에서 앙드레 김을 위해 에펠 탑에서 패션쇼를 기획한 적도 있었죠. 그때가 1958년이었을거에요. 그리고 한국 대사와도 가깝게 지냈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한국인들과의 교류가 줄어들었어요.
아버지의 독립운동이 한국에 언제 알려지게 되었나요 ?
-1971년에 한국 기자들이 왔어요. 그때 아버지에 대해 알려졌을 수 있고요, 누나 두 분이 한국에가서 살았어요. 아마 인터뷰를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지난 화요일에 MBC와 인터뷰가 있었어요. 황기환 지사와 아버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어요. 바로 며칠 전에 황 지사의 유해가 봉환되었죠. 황기환 지사는 파리에 있으면서 아버지와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가는 것을 막아주었어요. 생명의 은인이죠. 그는 미국에서 돌아가셨는데, 원래 아버지와 함께 유해가 봉환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황기환 지사에게는 가족이 없었고, 미국은 가족이 있어야한다고 해서 늦어졌어요. 국가보훈처에서 그가 가족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그래서 이번에 봉환될 수 있었던거에요.
한국은 가보셨겠어요.
-여러 번 갔었어요.한국의 발전은 정말 대단해요. 처음에 간게 1970년이었어요. 누나가 한국인과 결혼을 해서 서울에 살았어요. 고층 아파트에 살았는데, 그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광경은 지금의 아프리카 같았어요.쌀을 자전거에 싣고 가는 이들, 그리고 리어카들도 보였어요. 가난했어요. 당시 김포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어떤 호텔이 기울어져 있는거에요. 건축업에 비리가 있어 필요한 양의 시멘트를 사용하지 않아서그렇다고 설명해 주더라고요. 그리고 두개의 큰 건물 사이에 작은 집이 있더라고요. 집 주인이 팔지 않기를 원해서 그렇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에 갔을 때는 부산에 갔었는데, 고속도로의 발전이 인상적이었어요. 다리와 터널 등…이곳 부르타뉴는 중심으로 쉽게 들어오는 도로 건설에 50년이 걸리고 있어요. 아직도 다 완성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요.
한국 음식을드세요 ?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한국음식을 해주셨어요. 저희에게 김치 담그는 것도 가르쳐주셨어요.
어버님, 홍재하 지사의 독립 운동은 지금 젊은이들,즉 후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
-아버지가 하신 일은 나에게는 애국심의 훌륭한 본보기인 것 같습니다. 고국에 대한 애착은 중요합니다. 한국에 가지 못한 아버지가 불행한게 항상 느껴졌어요. 아버지는 한국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나라라고 하셨어요. 이런 애국심은 아주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에게 애국심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아요 아버지가 지금의 시대를 보셨더라면 경악하셨을거에요. 개인적인 유익 보다는 나라를 존중하고, 유익을 위해 일하셨어요.
홍재하 지사 관련 책을 준비 중이시라고요 ? 책에 대해서 말씀해주세요.
-일제 전의 한국 역사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서,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도 나치에 의한 학살을 경험했는데요, 일제 시대 한국도 마찬가지였죠. 그런 부분들을 서술하면서 왜 아버지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는지, 한국을 떠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고, 아버지가 가정을 꾸리고 우리에게 남겨주신 가치들, 교육 등에 관한 것들에 관한 책입니다.
책 제목을 알려주실수 있는지요 ?
-아직 못 정했어요.
한국어로 번역 출간하시면 좋을텐데요.
-프랑스, 한국쪽 모두 알아보고 있어요. 반 정도 진도가 나갔는데 하는 일이 너무 많아서 진행이 잘 되지는 않고 있어요.
무슨 활동을 하시는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
-한국 대사관 명예 영사 그리고 부르타뉴 위원회 프랑스 수출 자문위원으로 있고요, 이는 수출업하는 스타트 업 기업을 도우기 위한거에요. 프랑스 기술직 시험(BTS) 준비위원, 그리고 생 뷔리유 Saint-Brieuc 기업 사장단 협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고, 아프리카 음식 보존을 위한 인도주의 협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어요. 아프리카 나라들이 수확한 음식 보존을 못해서 60%가 버려지고 있어요. 그리고 기아로 죽어가고 있죠. 그래서 진공 포장 등으로 실온에서 6개월에서 9개월 정도 보존할 수 있는 것을 설치해주고 있어요. 곧 아프리카에 가야 해요.
인도주의 협회 일도 하시는데 이런게 아버지 교육의 영향일 수 있겠네요.
- 그럼요, 사람을 존중하고 서로 나누고요, 아버지는 인도주의적인 분이셨고, 관대한 분이셨어요.
홍재하 독립지사 아들, 장 쟉크 홍 퓌안 Jean Jacques Hong Fuan 씨 인터뷰 파리광장 사이트에서 보기
<파리광장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