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이재봉 칼럼니스트
장모님께서 돌아가셨다. 1930년 2월 3일생이니 88회 생신을 맞아 떠나신 거다. 1975년부터 살아오신 미국 시간으로는 생신을 하루 앞둔 날이지만. 아내와 나의 부모님 네 분 가운데 홀로 남으셨던 분이다. 5남매 중 셋째인 아내와 6남매 중 막내인 나는 어느 부모님도 모시고 살아본 적이 없기에 부양(扶養)이란 부담에서 벗어난 게 아니라 마지막 버팀목을 잃은 완전 고아가 되었다.
1987년 1월 텍사스에서 유학 중 그 분 맏딸과 맞선 보러 워싱턴에 갔다. 항공료 아끼려고 이틀간 버스를 타고 갔던 가난한 유학생이 되돌아올 때 김밥 한 꾸러미를 안겨주셨다. 정성이 듬뿍 담긴 김밥 맛이 나의 청혼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내 청혼 편지에 그 집안 어르신들 가운데 크게 반대하는 분이 계셨다는데 어머님은 적극 찬성하셨단다. 총각 눈꼬리를 보니 선하게 생겼다면서.
사위를 몹시 사랑하면서도 왠지 어려워하셨다. 장모의 분명한 예의범절과 사위의 수더분하지 못한 성질 탓이었을 게다. 1989년 첫 외손자 돌봐주러 딸네 집에 와 계시던 중 뜨거운 텍사스 햇볕 아래 조그만 아파트 수영장에서 장모와 사위 둘이 잠시나마 함께 수영을 즐긴 건 잊지 못할 추억이다. 여고 수영선수 출신이라는 아내의 귀띔에 장모님께 앙탈부리듯 수영복을 입힌 덕분이었다.
내가 술을 참 즐기는데 술집 보다 집에서 마시기를 좋아하기에 아내를 술친구로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아내가 10여년 전 처가를 방문해 나 못지않은 애주가들인 두 오빠들과 맥주 한 잔 들이켰단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어머님이 딸을 방으로 불러들여 여자가 무슨 버르장머리냐며 호통치셨지만, 이 서방에게 술을 배웠다는 대꾸에 누그러지시더란다.
지난 12월 노환으로 6개월 사형선고 받으셨다는 소식에 아내부터 서둘러 미국에 들어갔다. 돌아가신 뒤 눈물 쏟으며 애통해하는 것 보다 살아 계실 때 하루라도 더 뵙는 게 바람직하다는 내 의견을 따른 것이었다. 나도 학교일 마무리하고 2주 간 장모님 곁을 지켰다. 사위를 반기면서도 언뜻 높임말 한 마디 던지신 게 아직도 맘에 걸려있다. 두어 달 동안 물만 드셨다지만 누워 계시면서도 기력을 잃지 않고 기억력이 총총하던 터였다. 사위가 얼마나 살갑게 굴지 못했으면 순간적으로나마 경어(敬語)를 쓰셨을까.
밤마다 몇 분 간격으로 몸을 뒤척이시는 어머님과 뜬눈으로 밤샘해야 하는 맏딸의 고통이 날로 심해졌다. 그걸 참기 어려워 사위는 안락사나 존엄사를 고려했으니 끝까지 큰 죄를 지었다. 그 대신 맏딸이 꼭 한 달 반 동안 밤잠 못 자고 병상 지키며 수발 들었으니 마지막 효도는 톡톡히 한 셈이다.
한국 시간으로 3일 새벽 1시, 플로리다 시간으로 2일 오전 11시, 엄마가 돌아가셨다며 전화로 울먹거리는 아내에게 이미 예상하고 기다리던 터 아니었느냐며 다독였다. 남은 자식들이 어머님 몫까지 더 건강하게 더 열심히 더 화목하게 살아가자는 말을 덧붙였다. 장모님의 명복을 빌며 아내가 18년 전 썼던 글이 떠올라 다시 읽어본다.
현대 속의 조선 여성
핑크빛 넝쿨장미가 흐드러지게 피던 1975년 여름, 유복자를 낳아 아들 바라지로 평생을 홀로 살아오신 할머니를 뒤로 남긴 채 우리 가족은 하와이행 비행기를 탔다. 큰오빠의 대학입시 낙방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난생 처음 자신의 홀어머니를 떼어놓고 우리 5남매의 공부를 위해 이민이란 피눈물나는 결단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내 나이 열다섯 살, 새내기 여고생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에 마음껏 취해 있었다. “그래 입시가 없는 나라, 쵸콜렛과 바나나를 실컷 먹을 수 있는 부자 나라로 가는 거야. 더구나 하와이라면 지상의 낙원이라고 하지 않은가.”
도시 한 복판에 펼쳐진 검푸른 꿈의 바다 와이키키, 창문 밖에 즐비하게 늘어선 야자수에 주렁주렁 매어 달린 코코넛 ..... 그 아름다운 땅에 우리 가족은 소리 없이 슬픔의 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미국정부 업무와 관련된 일을 했던 관계로 쉽고 빠르게 하와이 땅을 밟을 수 있었지만, 그 곳에서 직장을 구하는 데는 몇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사업 머리도 부족했던지 가져간 돈을 까먹기 시작했다. 게다가 금세 할머니를 모셔올 수 있으리라던 기대는 냉혹한 미국이민법 앞에서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먼 이국땅에서 친척 하나 없이 외롭게 고립되어 있던 가운데, 할머니가 연탄가스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靑天霹靂)이었다.
1970년대까지 고국에 있을 때는 자가용까지 굴리며 남부럽지 않은 일을 하다가 실업자로 전락한 상태에서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주정뱅이로 변해갔다. 연이은 폭음은 어머니와 자식들에 대한 손찌검으로 이어졌다. “너희들 때문이야, 우리 엄마가 죽은 것은 .....” 아마 내가 그 말을 이해하기엔 어렸나보다. 아버지가 싫어졌다. 할머니의 과잉 보호로 나약하게만 자란 아버지는 이민이라는 잘못된 선택으로 할머니를 버렸다는 멍에로부터 끝내 헤어나지 못한 채, 가족을 위해 돈벌이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폐인처럼 10년을 그렇게 자학하며 살다 “어머니!”란 외마디만 남기고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셨다.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신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우리 5남매는 암울했던 청소년기를 어렵게 넘겼고, 나는 어느새 나이 스물을 훌쩍 넘겼다. 그리고 별 일 없이 서른을 바라보게 되었다. 주위에서 소리 없는 독촉이 나를 죄어왔다. “여자의 가는 길, 어머니 오신 길, 나도 그 길을 가야만 할텐데 산 넘어 저 산 넘어 행복이 있었으면 .....” 이국땅에서 즐겨보던 「가시리」라는 연속극 주제가다.
아버지에 대한 불행한 기억들 때문에 독신을 고집했던 나는 등 떼밀리듯 친척의 소개로 텍사스에서 공부하던 한 유학생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그는 가진 것이라고는 책 보따리 몇 개가 전부인 몹시도 가난한 유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주말이면 플리마켓에서 장사하며 공부한다고 했다. 1987년 1월 겨울방학을 맞아 꼬박 이틀 동안 버스를 타고 맞선을 보러 왔다. 하얀 눈이 소복히 내리던 날 가진 첫 만남이었다. 건조한 날씨에 뙤약볕으로 이름난 텍사스에서 길거리 장사를 한 탓인지 까맣게 탄 얼굴에 비쩍 마른 몸이었다. 두 달 뒤 봄방학을 맞아 약혼을 한 게 그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고, 다시 두 달 뒤 여름방학 중에 가진 결혼식이 세 번째 만남이었다.
고고히 출범하는 제2의 인생은 노점상 아내로 시작되었다. 주말 장사를 위해 금요일 밤에는 잠도 못자고 왕복 15시간 안팎을 운전해 물건을 사와야 했다. 아침부터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40도가 넘나드는 더운 날씨에 에어컨도 없는 차를 몰면서 말이다. 경비를 아끼려고 각각 두 살과 삼 개월 된 두 아들을 데리고 다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도 보채지 않고 얼음주머니를 안고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똑바로 지켜보기 어려웠다. 이렇게 열심히 산 덕분에 남편은 1994년 약 10년에 걸친 유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고국의 가족들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거의 받지 않고 박사학위를 받게 된 것이었다.
남편은 유학하는 동안 부모님을 잃게 되었지만, 나는 친정어머니도 보지 못한 채 남편을 따라 고국 땅을 밟게 되었다. 역이민이라고 할까. 20여년 만에 바라본 고국의 가을 하늘은 예전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 밑의 모든 것은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사람도, 차도, 집도 ..... 모든 것이 넘쳐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 고향인지 미국이 고향인지 갈팡질팡 마음을 못잡는 4년간의 한국 생활이었다. 결혼 후 10년 동안 어머니를 서너 번 밖에 보지 못했는데, 미국에 있을 때는 그래도 같은 미국 땅에 살고 있다는 위안이라도 가질 수 있었지만, 한국에 오니 ‘어머니’란 이름만 들어도 왜 이다지 가슴이 에어 오는지 ..... 아버지의 한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지난 겨울방학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벼르며 저축을 하는 등 열심히 미국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국에 온 지 5년 만인 셈이다. 그러나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비행기 예약까지 마친 우리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머리가 자주 아팠던 큰아들이 상당히 크고 심각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아들이 서울에서 무사히 수술을 마치던 날 이제는 남편이 익산에서 입원하게 되었다. 교수가 된 뒤로 유학생 시절보다 더 열심히 책에 매달리던 남편이 밤낮을 거꾸로 살다 얼굴 신경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구안와사라고 했다.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우환으로 난 겨울방학 동안 발을 동동 구르며 서울과 익산의 병원들을 오가며 눈물로 지냈다.
곁에 친척 하나 없이 늘 외톨이로 지내온 우리 가족에게는 서로의 위로와 사랑만이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랄까. 오랫동안 저축해 모은 미국행 여비는 아들과 남편의 병원비로 쓰고 미국에 계신 어머니 칠순 잔치에는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우리 가족 사이의 정과 사랑은 더욱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잠시 책을 덮은 남편과의 여유로운 시간과 대화는 왠지 허전했던 그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생긴 빈틈을 꽉 메어주었다.
우리 가족에게 믿음과 건강만 허락된다면 여성운동에도 관심을 가진 남편에게 난 조선시대의 여자를 자처하며 어머니 오신 길을 자랑스럽게 걸어가고 싶다. 여성운동 분야에서 삼종지도를 거세게 비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아버지를 따라간 이국과 남편을 따라 찾아온 낯선 고국에 이어, 언젠가는 아들을 따라 제3의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내 어머니의 칠순 잔치 사진 속에 비어 있을 내 자리를 생각하며.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이재봉의 평화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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