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생활이 좀 남루하다’고 하는 서정주의 말은 가난의 실체를 모르는 사람들의 멋진 시적인 구라입니다. 무소유를 말하는 법정 스님의 말도 가난하고는 거리가 먼, 기본적인 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말이죠. 그리고 법정스님이야 가정이 없으니까 가난한 아내의 끼니 걱정도, 돈이 없어 기죽은 아이들의 마음도 그리고 돈이 없어 학교도 못 가고 병이 나도 그냥 파스 쪼가리만 붙여야 되는 사람들의 질식할 것 같은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이겠지요.
더구나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라’는 말도 가관입니다.
이것은 정말 먹물이나 든 사람들이, 남보다 더 잘 살지 못하는 것을 말로 자위하는 샌님 같은 소리일 것입니다. 정말 자신들이 한번 모든 것을 다 잃고, 어디 가서 때 꺼리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가난의 극치를 경험한다면 아무리 찢어진 입이라도 그런 소리는 나오지 못할 것이며, 그때가 되면 가난이 무엇인지 그들이 왜 가난 때문에 생을 포기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물질적 가난에 치를 떠는 사람은 정신적 가난, 영적 가난 같은 호사스런 소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물질적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정신적 풍요를 느끼는 사람은 진짜 가난을 모르는 사람이거나 죽을 것 같은 가난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사람일 것입니다. 아마 그도 좀 더 가난의 진도가 나가면 영적 가난이나 파탄을 반드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침 새벽시장에 나가보면 쓰레기통을 뒤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고물을 찾는 아이도 있고 먹을 것을 찾는 아이도 있습니다. 너무 안쓰러워 조금 돈을 주면 바로 앞에서 무럭무럭 김이 나는 밥을 팔지만 거의 대부분 사먹지 않습니다. 왜 안 사먹느냐고 물으면 집에서 엄마와 밥해 먹을 쌀을 사려고 한다고 합니다. 이 정도면 정신적으로는 아주 건강한 것이죠.
그러나 좀 더 큰 아이들은 좀 다릅니다. 본드를 사서 흡입하려는 것이죠.
이제 이 수준이 정신적 파탄에 이르는 상태입니다. 왜 그러냐고 하면 너무나 힘이 들고 지쳐서 이제는 이 재미도 없으면 살수도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나는 그 아이들을 이해합니다. 가난에 지쳐 보여지는 삶이 너무나 선명해서 그 아이들은 그렇게도 어린 나이에 인생의 절망을 알아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선택할 수 있는 피난처를 찾아 간 것입니다. 너무나 어이없고 서글픈 비극이죠. 여자아이들은 너무나도 손쉽게 매춘을 배워 버립니다. 너무나 절망적인 상태에 처해버리면, 그 지독한 서러움을 잊기 위해 그냥 본드를 마시고 마약을 나눠 피고, 이 돈과는 무관하게 뒹구는 것이죠. 잠시를 잊으려고요. 그리고 조금 더 몸이 커지면 아주 쉽게 엄마에게 쌀을 사 가지고 갈 재주를 알아 버리는 겁니다.
가난이란 이런 것이죠.
예전에 베트남에서 온 시골처녀들이 캄보디아에는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계가 막연한 부모, 버려져 있는 동생들을 그냥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자신이 몸을 팔기로 하고 단 돈 200불에 팔려 온 처녀들이었습니다. 인신매매하고는 다릅니다. 3년 혹은 4년정도의 계약기간이 끝나면 정말 아무 제약도 없이 풀어주는 자의적 계약이니까요.
처녀들은 단단하게 마음먹고 돈을 벌어 집으로 부치고, 돌아가 고향에 자그마한 가게를 내고 할 생각으로 살아갑니다만, 때로는 그 중에는 에이즈에 걸려 몸을 망친 처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처자들이 베트남으로 돌아가는 배 안에서 슬피 울다가 한을 안고 메콩강에 몸을 던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참 가난이란 이렇게도 서러운 비극입니다.
어제 베트남에서 팔려왔다가 너무 못 먹어서 빈혈이 되고 거기다가 폐병까지.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하루에 마약 한 모금의 망각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러나 아이는 무려 다섯이나 달린 서러운 과부의 인생을 만났습니다. 손을 잡기도 무서운, 나무뿌리처럼 말라버린 손에 10불을 쥐어주고 내가 무슨 죄를 지어 이런 사람까지 만나 이런 눈물을 흘려야 하나하고 오랫동안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마음을 외면하려는 마음 - 죄악입니다. 나도 죄인입니다.
아닙니다. 죄인, 괴수중의 괴수일 것입니다. / 정지대
가난, 배고픔... 역사 이래 인류 모두의 고민이죠. 가난의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치다 보면 종종 개인적 죄책의 차원을 떠나서 가난을 항구화 시켜온 '구조적인 모순'이라는 문제와도 맞딱드리게 됩니다.
하하 마지막 문장에서 '괴수 중의 괴수'라는 종교적 고백까지 듣자니 성경의 일화들이 떠오르는군요.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일화가 등장한 이유, 예수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며 제자들에게 권했다는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귀절이 들어간 이유... 아니, 성경 전체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가난'이라는 이슈가 인간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인간사에 어떻게 관련되어 있나를 말해주는 것일 겁니다. '가난'의 문제는 어쩌면 인류의 '구원'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예수도 고민하고 카알 마르크스도 고민한 문제 가난, 배고픔...
그런 의미에서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인간의 무한대의 탐욕을 맘껏 펼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 신자유주의는 적극 배격해야 할 못된 흐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으윽... 1990년대 중반, 우리의 반쪽 북녘동포들이 200만 300만이 '배고픔'으로 죽어 나갈 때 우리가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지도 생각나는 군요.
그동안 우리 협회 대회참석하면서 종종 같은방에서 이야기도 나누었었고 아시아, 수많은 가남한 사람들이
있는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정대표님과 저의 사이입니다.
느껴지는 공감대는 마음속으로 들어오고 차분한 분위기속에서 한동안 혼자 앉아있게 만들었어요.
저는 가난한 인도교회에 매주 가서 못배우고 무지한 10대들을 위해 성가대 조직해서 찬송가를 아르끼고 있답니다.
perungudi, 이만여명이 사는 첸나이에서 가장 빈촌.
사는 동안 뭔가 선한일을 해보고자 하지만 완전할수 없고, 허무할때도 있고..
어찌됬건 우리서로 위로 하면서 꾸준한 발걸음을 계속해 보십시다.
정말 좋은 글입니다.
가슴 한켠이 먹먹해지네요.
몇년 전 아프리카 최빈국 말리라는 나라를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가도가도 끝없이 거대한 언덕 같은 것들이 펼쳐졌는데, 안내해주시는 분 말로는 쓰레기더미라고 하더군요.
다른 곳도 아닌, 그 나라의 수도라는 바마코였는데 말이죠.
그속에서도 무언가를 찾아 헤집고 있는 앙상한 아이들을 보고 가슴이 참담해지더군요.
세상에 저 가난한 나라의 쓰레기 더미 속에서 또 뭐가 나올 게 있다고...
그곳을 헤집으며 무언가를 주워먹고 있는 아이들... 차마 눈뜨고 보기가 어려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