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제목의 고갱의 그림을 기억합니다. 아마 야자수 사이로 남방의 입술이 두터운 여자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술선생님이 보여주던 고갱의 그 그림을 저는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이름만은 기억합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그 당시 너무나 저에게는 멋지게 들렸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시작과 끝, 삶의 의미 그리고 본질을 말하는 듯한 느낌이 있어서이겠지요.
그러나 그때는 제가 겉멋이 들어서이겠지요. 그래서 그 이후부터 저는 무슨 "우리가 무엇이 되어 만나랴" 든가 더 폼나는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의 잘 모르면서 남들에게 폼잡기 좋은 이름만 보면 꼭 한번은 외웠다가 써보는 버릇이 생겼답니다. 이제는 약발도 안 먹혀서 오래전에 포기했지만요. 여하튼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이런 투로 작업을 많이 했고, 그래서 아가리라는 별명도 얻었답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야, 정말 나이 육십이 다 되어서야 진짜 "나는 어디서 왔다가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생각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절로 생각에 잠기는 것이지요. 나이도 나이거니와 지금 태평양 한가운데 그것도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섬에서 보내는 일상이 저의 삶을 관조하게 한다는 것이 맞습니다.
하루 종일 해변에 앉아, 우리 인간이 한 알갱이의 모래로 변해 버리는 에머랄드빛의 창연한 바다를 바라보는 티모르인들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왠지 슬퍼지는 이런 충격적 경험이 아니면 제가 이런 고상한 생각을 하기나 할 사람인가요?
내가 지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인터넷 카페 유리창 건너로 작살에 고기 몇마리를 꿴 티모르 원주민이 원시의 복장 그대로 지나갑니다. 첨단과 원시의 공존이 이처럼 극명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이런 상황에서는 한곡조 꽝 하듯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고 지금 최첨단의 컴퓨터 판때기를 두드리는 나와 작살에 고기를 꿰고 가는 저 문신의 사나이가 사는 의미가 절로 생각이 된다는 말이지요.
그 먼 날 작살에 고기 한 두점 꿰고 돌아가면 불을 피워놓고 기다리는 아내와 주렁거리는 아이들에게 자랑스레 고기를 풀어놓고 바나나 익어가는 냄새에 하루의 피로가 뭏혀 버리겠지요. 삶을 자연에 맡겨버리는 삶. 그래서 그는 환상을 쫓고 먼 세월의 선조를 생각하고 그리고 아들의 이름을 "숲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속삭임"이라거나 딸의 이름을 " 흐르는 냇물의 영혼"이라고 짓겠지요.
이런 생각을 하면 우리는 참 모질지요.
잘 살려는 욕망이 참 우리를 모질게 만들고 우리의 영혼을 척박하게 만들죠.
그냥 잘 살려는 의미가요. 그냥 살려고 하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지는데요.
그래요, 살려는 것과 잘 살려는 것이 이렇게 사는 방법과 의미를 바꾸는군요.
잘 살기 위해 그냥 살려는 사람을 밟아야 되는 이 세상이 정말 바람직한 세상인가요?
진실로 인간이 무엇이길레 이렇게도 모질게 죽이고 짓밟고 그리고 슬프게 하는 건가요?
우리는 진정 자신의 것을 조금씩 나눠주는 그런 나눔과 코이노니아의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요?
티모르는 참으로 척박한 땅이군요.
어떻게 이런 땅까지 사람이 와서 살아야 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의 좋은 땅 다 놔두고 이 곳의 가파른 산기슭에서 살아가야 하는지요.
아마 무슨 무슨 이유로 이곳으로 흘러 왔거나,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찿아 왔거나...
아니죠. 쫓겨 왔겠죠. 전쟁에 패배해서, 삶에 지쳐서 아니면 표류해서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러나 그렇다해도 이 산밖에 없는, 땅뙈기라고는 손바닥 만 하고 해변은 산호초와 암초로 덮히고 1년에 반은 건기가 되어 농사지을 물도 없는 이곳에 스며든 그 인생이 이제는 문명에 쫓겨 산으로, 산으로 산속으로 파고들어 숨어 사는 것인가 하는 거지요.
어제는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 봤습니다.
그리고 나는 진정으로 "우리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또 지금 인생의 열매를 정리해야하는 나이 오십의 초가을에 선 나의 삶을 다시 돌아 봤습니다.
그렇군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빛과 소금의 생명을 주시어 당신이 살기 원하시는 이 땅에 보내고, 그리고 나는 당신의 진리와 영혼으로 이 땅을 당신이 원하시는, 당신의 자녀들이 살기에 적합한 땅으로 만드는데 쓰임 받다가, 그리고 나는 당신의 품안에서 잠들 것입니다. 이렇게 쓴다면 저도 좀 하나님의 말귀를 알아듣는 사람이 되었나요?
하나님. 저의 영혼을 지켜주시는 하나님.
제가 절망하여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죽기만을 원할 때
저를 살려주시고 지켜 주심을 제가 어떻게 해야 갚을까요?
제가 저의 삶과 생명을 당신께 드리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의 삶이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이 땅의 지친 영혼을 달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정지대 (뉴스브리핑 캄보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