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영국과 러시아는 자국의 안보와 식민지 확보를 위해 당시 무주공산이었던 중앙아시아를 놓고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을 벌렸다. 제국주의 시기 영국은 인도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는 남쪽 부동항을 찾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등 지금의 중앙아시아를 무대로 치열한 첩보전과 군사적 경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영국은 러시아가 인도까지 진출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중간 길목인 아프가니스탄을 세 차례나 침공해 점령하였지만 내부 반란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러시아는 카스피 해 북쪽를 횡단하는 수차례의 걸친 비참한 실패를 무릅쓰고 1844년 마침내 현재 중앙아시아인 西투르키스탄을 점령하여 영국과의 경쟁에서 최종적으로 성공하였다. 그레이트 게임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이후 약 200년 동안 중앙아시아를 지배하면서 고립된 시베리아의 지배자에서 유라시아의 강국으로 거듭났다.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21세기 그레이트 게임이 다시 시작되고 있다. 지금 게임의 주체는 미국과 중국이며 전략적 목표는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고립이다. 1991년 냉전의 해체 이후 미국 주도의 질서가 약 20년 가까이 유지되었지만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군사적 실패를 경험하였고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경제적 지배력도 대폭 상실하였다. 미국의 국제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과 반대로 중국은 2010년부터 글로벌 G2로 급부상하였다. 중국은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영향력 약화된 유라시아에서 패권국가로 부상하였다.
오바마 정부는 글로벌 금융위기와 의료보험 개혁 등 복잡한 내정을 수습하고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 견제에 나서고 있다. 미국은 중동에 집중해 온 외교·군사정책의 중심을 아시아로 이동시키겠다는 '아시아 중시(Pivot to Asia)‘ 전략을 채택하였다. 이 정책의 목표는 더 이상 중국의 영향력을 동북아와 유라시아에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중국이 아시아의 패권국가가 될 경우에 태평양 건너 미국의 위협이 된다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소련의 부상을 염려해서 대 소련 봉쇄정책을 펼친 것처럼 미국은 중국을 대상으로 태평양 동쪽과 유럽으로의 진출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미국의 대 중국 봉쇄 전략에 대응해 중국은 ‘신형대국론’을 내세우며 중국과 미국이 상호 이익을 존중하면 대결을 극복하고 선순환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이론은 미국 사회에 만연한 ‘중국위협론’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으로 세력균형이론의 대가 케네츠 왈츠(K. Waltz)가 양극체제 하에서 세력균형이 이루어졌을 때 평화가 유지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을 중국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양대 초강국이 대결보다는 협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형대국론은 논리적으로 유라시아에서 평화와 안정의 가능성을 높이지만 문제는 중국과 미국의 ‘핵심 이익(core interest)’이 공존 가능한가이다. 중국의 핵심이익인 대만, 티베트,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미국은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중국 또한 미국의 대만에 대한 무기 수출과 동·남중국해 문제에서 일본, 베트남, 필리핀의 편을 드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다. 두 국가의 핵심이익이 이처럼 양립하기 힘들기 때문에 새로운 세력균형이 형성되기까지 그레이트 게임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레이트 게임의 주체인 미국과 중국은 한계점도 동시에 갖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은 동북아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미국은 이런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일본과의 협력을 우선시하고 있다. 오바마는 과거사 부정으로 동북아 국가의 공분을 사고 있는 일본을 이용해 중국을 제압한다는 전략을 노골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또한 최근 TPP 체제 구축을 통해 폐쇄적인 경제블럭을 형성하고 중국 배제를 노골화하고 있다.
중국의 한계는 시장과 자원의 문제이다. 중국은 대부분의 상품을 미국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중국의 힘으로는 미국과의 전면적인 대결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중국은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 중국의 또 다른 불안 요인은 에너지 자원이다. 중국은 중동 국가로부터 대부분의 에너지를 수입하고 있다. 중동으로부터 수입되는 에너지는 미국의 해상 영향권이 작용하는 인도양과 남지나해를 통해 공급되고 있다. 중국은 에너지 안보를 위해 최근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로부터 가스 수입을 확대하고 있으며 2014년 러시아로부터 향후 30년간 1조2000억 달러 규모의 가스를 수입하기로 결정하였다.
중국은 시장과 자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부터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하나로 묶는 '일대일로'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자본금 1천억 달러의 AIIB 체제 구축을 목전에 두고 있다. 중국의 투자에 목마른 유럽과 중앙아시아, 인도, 심지어 한국까지 AIIB에 가입하면서 미국은 그동안 인권 문제로 소원하였던 중앙아시아 국가와의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케리 미 국무장관은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드에서 중앙아시아지역 5개국 외교장관들을 만나 미 국무부와 중앙아시아 5개국 외교부가 정기적으로 논의하는 고위급 협의체 C5(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1(미국) 을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C5+1‘은 ‘이슬람국가(IS)’ 등의 영향력이 확대하는 아프가니스탄 정세가 중앙아시아 전체의 안전보장을 위협하게 될 ‘중요한 요소’라고 보고 6개국이 “테러와 대량파괴무기의 이동, 마약밀수, 인신매매 등 국경을 초월한 위협에 대처해 협력을 확대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앞서 케리 장관은 미 국무장관으로서는 처음으로 10월 31일에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하고 1일 우즈베키스탄에 이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등을 차례로 순방하였다. 케리 장관은 중앙아시아의 독재자들과 양자회담을 통해 미국이 이제 인권을 문제로 더 이상 중앙아시아에 개입하지 않을 테니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주문하고 있다. 케리 장관의 방문에 앞서 아베 총리 또한 중앙아시아를 방문하여 키르기스스탄에 1억 700만 달러, 우즈베키스탄에 1억 530만 달러, 타지키스탄에 740만 달러의 개발원조를 제공키로 하고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과는 대규모 투자협력을 약속하며 돈 보따리를 풀었다.
케리와 아베가 노리는 것은 지정학적 분쟁 가능성이 높은 센카쿠, 쿠릴 4개섬, 독도 등 일본이 중국, 러시아, 한국과 벌이는 영토분쟁에서 자국에 유리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만들고 러시아와 중국에 우호적인 중앙아시아를 중립화시키려는 것이다. 미국이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워 중앙아시아 국가에 군사지원과 정상적인 외교관계을 약속하고 일본이 돈 보따리를 풀면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친러, 친중 외교 기조는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갈수록 첨예화되는 미중의 그레이트 게임에서 한국은 미세한 정세 변화라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윤성학 객원논설위원, 고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