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내국적은 일본’
Newsroh=로창현 칼럼니스트
지난 주 페북에 이승만이 일제 강점기 미국에 입국할 때 국적으로 일본으로 표기했다는 2013년 뉴스로(NEWSROH) 보도를 소개했습니다. 반응이 정말 뜨거웠습니다. ‘공유하기’만 300회에 달했으니까요.
거의 모든 분이 이승만의 두 얼굴에 충격과 분노를 느낀 탓이었지요. 그런데 어떤 분이 공유한 글에 누군가 아래와 같은 댓글을 달앗더군요
“아 이사람아 역사도 아니 배웠노? 이승만 박사님 때는 일본국 강점기 였는대 일본국이라 아니하고 대한제국 이라고 썼을턱이 있을까나? 구글에 들어가 검색하여보이소! 구글에서 이승만 대통령각하 검색하여 보니 일본국이라 표기한것 맞는기내여 우리나라가 1945년도에 일본국으로 부터 독립되었으니 말이죠 뭘 좀알고 sns 에 글을 올리시라여?”
사실 이런 댓글에 일일이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지만 혹여 오해하는 분들이 계실까봐 그 시절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아래 기사 하나를 더 소개합니다. 역시 2013년에 취재했구요. 뉴시스통신사 뉴욕특파원을 하면서 송고한 글이기도 합니다.
* ‘일본국적’ 이승만, 동시대 미주한인 90% ‘한국국적’
동시대 독립운동가 박용만 민찬호 선생 국적 ‘한국’ 표기 (2013.10.17.)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미국 체류 시절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것과는 달리 그 시절 박용만, 민찬호 선생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절대 다수의 미주 한인들은 국적을 한국(Korea)으로 당당하게 표기한 사실이 16일 밝혀졌다.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Ancestry.com)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하와이와 LA 지역의 한인들이 제출한 1차 세계대전 징집카드(U.S. World War I Draft Registration Cards) 중 90%가 국적란에 ‘Korea’로 기재했고 나머지는 ‘China’, 드물게 ‘Japan’으로 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확인한 징집카드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작성한 1918년 10월을 기준으로 한 것들이다. 뉴시스가 지난 10월5일 보도한 이승만의 징집카드엔 ‘영문 이름’(Syngman Rhee), ‘생년월일’(1875년 3월26일), 직업(한국학교 교장), 하와이 주소 등 인적 사항과 함께 국적이 ‘일본’(Japan)으로 자필 기재돼 충격을 주었다.
이승만의 징집 카드. 나이는 44세, 생년월일과 국적을 '일본(Japan)'으로 기재했다
일각에서는 “일본의 식민지였던 당시에 한국(Korea)이라는 나라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두둔했지만 미국에서 독립운동가를 자처한 그가 스스로 국적을 일본으로 기재한 것은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반면 이번에 함께 발견된 동시대의 독립운동가 박용만, 민찬호 선생의 경우 국적을 ‘Korea’라고 밝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미주 한인들 대부분이 국적을 ‘한국(Korea)’으로 기재했다.
하와이에서 ‘쌀농사(Rice Planted)’ 를 짓는다고 밝힌 김명옥(당시 44세)은 자신의 한자 이름(金明玉)과 함께 국적을 ‘Korea’ 라고 적었다. 또한 하와이 호놀룰루의 노동자 김경선(44세)과 김용순(43), 김광채(43), 김성은(42), 신학대학생 김채성(40) 등 보통의 한인들도 한결같이 국적을 ‘한국’이라고 기재했다.
당시 44세였던 이승만의 아들뻘인 18세, 19세의 젊은 청년들도 국적을 ‘한국’으로 기재해 ‘일본 국적’ 이승만과 대조를 보였다. 이승만의 서류 다음다음 페이지에 나온 평양 출신의 신학대학생 18세 류창신(Ryu Chnag Shin) 역시 국적을 ‘Korea’로 기재했다.
평양 출신의 신학대학생 당시 18세 류창신(Ryu Chnag Shin)의 징집카드. 국적을 ‘Korea’로 기재했다
20세기 초 미주 한인들의 징집카드들을 면밀 분석한 뉴욕한국일보의 함지하 기자는 “알파벳 순서로 분류된 징집카드를 확인한 결과 당시 미주 한인들은 연령과 직업에 상관없이 거의 모두가 국적을 한국으로 기재했다”고 전했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국권을 잃게 됐지만 절대 다수의 미주 한인들은 국적을 ‘Korea'라고 당당하게 밝히며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미주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지도급 인사로 알려진 이승만이 개인 징집서류에 국적을 ‘일본’으로 기재한 배경에 대해 궁금증이 일고 있다.
그의 친일 행적을 공박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의 기회주의적 행태로 미뤄 개인서류에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뉴저지 포트리의 김정태씨는 “해방 후 스승인 서재필 선생이 권력을 잡을까 두려워 음해하고 정부 수립 후엔 친일파를 적극 기용했으며 한국전쟁 때는 서울 시민을 속이고 줄행랑치고 독재권력을 휘두르다 쫒겨난 장본인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꼬집었다.
한편 이번에 발견된 독립운동가 박용만(朴容萬) 선생과 민찬호(閔贊鎬) 선생의 징집서류에서 생년월일 등 그간 불분명했던 인적 사항이 확인돼 주목된다. 1917년 세계약소국 민족동맹회의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박용만 선생은 고향을 강원도 철원으로 밝혔고 1881년 9월27일생으로 당시 나이 37세였다. 직업을 농사(Farming)로 기재했고 ‘가까운 친척’은 아내(Y.M. Park)로, 거주지는 ‘1306 Miller St. Honolulu’ 로 당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주소를 넣어 눈길을 끌었다.
일련번호 1945인 민찬호 선생은 주소를 ‘318 N 28st. Los Angeles, CA’로 1878년 10월21일 출생(당시 40세)으로 기재했다. 직업은 목사(Minister), LA에 주소지를 둔 한국선교회 소속으로 돼 있다.
1905년 목회자로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교회에 초빙된 민찬호 선생은 1909년 이대위, 안석중 등과 연계, 한인 단체를 규합해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서 동시에 국민회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獻身)했다.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로창현의 뉴욕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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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본 -사진은 국적을 '일본(Japan)'으로 기재한 이승만의 징집카드.jpg (File Size:129.3KB/Download:36)
- 사본 -사진은 평양 출신의 신학대학생이었던 당시 18세 류창신(Ryu Chnag Shin)의 징집카드. 역시 국적을 ‘Korea’로 기재했다.jpg (File Size:95.1KB/Download: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