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고프 휘틀럼(왼쪽)과 70년간을 함께 한 부인 마가렛 여사(Margaret Whitlam). 지난 2012년 마게렛 여사가 사망했을 때 휘틀럼은 성명을 통해 “70년간 한결같이 나를 지지하고 이끌었으며 또한 네 자녀와 그녀의 가족, 호주 각계각층의 모든 이들을 사랑했다”는 말로 아내를 추모했다.
호주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 이끌어
1970년대 호주 노동당의 전성기를 만들며 호주 정치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정치인 중 하나로 꼽히는 고프 휘틀럼(Edward Gough Whitlam) 전 수상이 지난 10월21일 오전 9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휘틀럼 전 수상이 추진한 개혁은 호주 정치 사상 비교할 수 없는 변화를 이끌었고, 그런 만큼 전례없는 유산을 남겼다.
지난 호에 이어 휘틀럼 수상의 정치적 업적을 알아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기획 ① / 어린 시절과 정치 입문
기획 ② / 정치적 몰락과 노후
기획 ③ / 사진으로 보는 정치 활동
노동당은 1974년 동시선거(double-dissolution election)에서 승리하지만 국가 경제 운용에 있어서는 심각한 비난에 직면했다. 긴박한 경제상황에 대한 폭풍은 컸다. 연방 지출은 늘어났고 임금은 엄청나게 올랐으며 산업 분쟁이 늘어나고 인플레이션 급등에 실업률도 상승했다.
정부는 25%의 관세 인하를 단행했고 호주화 환율을 미 달러화 대비 25%까지 끌어올렸다.
정부의 운용 자금은 확실히 휘틀럼 정부의 극적인 몰락을 이끈 여러 가지 사건이 핵심이었다.
경제 악화 따른 재정 문제로 위기 초래,
‘수상직 해임’은 정치적 배경
특히 휘틀럼 정부의 주요 장관들이 Loans Council(외국으로부터의 차관 등을 통제하는 호주 정부 기관) 몰래 중동의 오일 부유국으로부터 미화 40억 달러에 달하는 차관 조달을 검토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Loans Affair’에 휘말렸다.
여기에는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국제 금융 중개인 티라스 케믈라니(Tirath Khemlani)가 관여하고 있었다. 그는 석유수출국(OPEC) 국가를 통해 자금을 확보하겠다고 약속했다.
연방 재무부의 고위 인사들은 이 같은 거래를 반대했지만, 어쨌든 캐믈라니는 자금을 마련하지 못했고 정부의 이 계획은 공식적으로 폐기됐다.
하지만 광산 및 에너지부 렉스 코너(Rex Connor) 장관은 비밀리에 케믈라니와 접촉을 계속하면서 차관유입 작업을 밀어붙였다. 재무부 짐 케언즈(Jim Cairns) 장관 또한 공식적으로 외국 자금을 확보하고자 멜번의 한 사업가와 편지를 통해 계약을 체결했다.
이와 관련, 케언즈 장관은 의회에서 그 같은 일에 대해 부인했고 또 멜번 사업가와 계약을 체결한 일도 없다고 주장했다. 휘틀럼 수상은 이 두 장관을 해임해야 할 처지에 직면했다.
휘틀럼의 정치적 위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74년에 터진 ‘Loans Affair’ 건은 상원에서 노동당 정부의 새 회계연도 예산안을 저지하고자 했던 자유당 말콤 프레이저(Malcolm Fraser)에게 정당성을 준 셈이 되었고 1975년 10월, 의회는 최악의 정치적 교착상태에 빠졌다.
야당은 휘클럼 정부에 선거를 치를 것을 강력히 요구했지만 휘틀럼은 이를 거부했다. 결국 여야간 최악의 정치적 교착상태는 11월11일 당시 호주 총독이었던 존 커 경(Sir John Kerr)에 의해 와해됐다. 커 총독이 자신의 권한으로 휘틀럼 수상을 해임한 것이다.
영 연방 국가로서 영국 여왕을 대신하는 총독(Governor-General)이 헌법상의 권한을 통해 실질적 국가 수반을 해임한 이 사건은 호주 역사상 초유의 일이며 현재까지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총독은 간단하게 펜 하나로 타격을 가했고, 고프 휘틀럼은 호주 수상(Prime Minister)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오늘날 단순히 ‘해임’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일로 당시 호주는 충격에 휘청거렸고 총독은 과도정부의 수반으로 말콤 프레이저를 임명했다.
휘틀럼은 총독으로부터 해임당한 뒤 국회의사당을 나오면서 계단에 서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아무도 총독을 구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가 ‘신이여 영항을 보호하소서’(God save the Queen)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God save the Queen’은 영국은 물론 영 연방 국가로 호주의 공식 국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이를 호주의 national anthem으로 불렀음). 한 호주 언론은 이에 대해 “휘틀럼에게 있어 말콤 프레이저는 ‘커 총독의 커’(Kerr's cur)로 내려앉은 것으로 보일 것”이라고 언급했다(cur는 ‘성질 사나운 똥개’라는 뜻도 있음).
총독의 충격적인 결단은 대중의 분노와 논쟁을 촉발시켰고, 휘틀럼은 헌법상의 문제보다 정치적 위기로 내몰렸다. 그의 정부는 정치적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 터이다.
하지만 한 달 후에 치러진 선거에서 말콤 프레이저가 수상으로 선출되면서 3년에 걸친 휘틀럼 정부의 획기적인 정치적 변화 시도는 끝이 났다.
의회 떠난 뒤에도 대외활동 주력,
노동당 역사의 거물로 존경 받아
휘틀럼은 다시 야당이 된 노동당 대표직을 유지하며 1978년까지 당을 이끌었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UNESCO) 호주대사로 임명됐으며, 호주 국립미술관 위원회(National Gallery of Australia Council) 의장직을 맡았다. 또한 휘틀럼과 부인 마가렛(Margaret) 여사는 2000년 시드니 올림 유치 활동의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저술 작업에도 몰두했던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경험에 관한 여러 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노동당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무렵, 호주의 공화제 전환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자 휘틀럼은 공화제 전환 지지 캠페인을 위해 자신의 오랜 정치적 라이벌인 말콤 프레이저와 손을 잡기도 했다.
지난 2010년 초, 93세의 휘틀럼은 동부 시드니(eastern Sydney) 엘리자베스 베이(Elizabeth Bay)에 있는 노인요양 시설로 옮겨졌다. 당시 그의 체력은 크게 위축되었지만 정신은 여전히 뚜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와 70년을 함께 하면서 정치적 뒷바라지는 물론 정치인의 아내로서 호주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부인 마가렛 여사(Margaret Whitlam)는 2012년 사망했다.
부인의 사망 당시 고프 휘틀럼은 마가렛 여사의 사망을 알리는 성명에서 “그녀는 주목할 만한 사람이었고 또한 내 사랑하는 아내였다”고 밝혔다.
이어 “결혼한 이후 70년간 한결같이 나를 지지하고 이끌었으며 또한 네 자녀와 그녀의 가족, 호주 각계각층의 모든 이들을 사랑했다”는 말로 아내를 추모했다.
생을 다하기까지 휘틀럼은 노동당 역사에서 위대한 정치인으로, 비전과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문제에 직면해서는 그것을 회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하는 그의 정치 스타일은 너무도 유명했고, 좋든 나쁘든 호주 역사에서 빠르고 비교할 수 없는 변화를 주도했던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유자녀로는 앤서니(Antony), 니콜라스(Nicholas), 스티븐(Stephen) 세 아들과 딸 캐서린(Catherine)이 있다.
김지환 기자 jhkim@koreanherald.com.a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