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화 70년: 10회] 전후 적색경보 속 언론·문인이 합작한 '간첩조작 1호' 시인
▲ 한국전쟁 직후 우익 문인·언론인이 합작한 간첩조작의 첫 희생양이 된 '보리피리'의 한센병 시인 한하운. |
남북은 공동 패자인데 싸우지도 않은 일본이 승전의 영예를 누렸다. 이 전범국은 "태평양전쟁의 수많은 기억을 쉽게 몰아내고 서방세계에 훨씬 안전하게 묶여졌다"(같은 책). 우리 피로 통통히 살찐 이 범죄국가는 태평양전쟁 부활전에 나서고 있다. 두 번째 덕을 본 건 장제스였다. 타이완 접수로 중국 재통일을 노렸던 마우쩌둥의 야망은 항미원조(抗美援朝)로 유보되어 장제스 독재는 탄탄해졌다. 중국은 친소적이었던 북한을 친중적으로 기울게 한 것으로 자족할 수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불안했던 동유럽 지배권을 굳히게 되어 두 진영의 비난에도 쾌재를 불렀다. 국민과 군대 모두에게 인기 없는 첫 전쟁을 치른 미국은 서태평양 시대를 연 데다 매카시즘으로 제국주의적 이미지를 표백시킬 수 있었다.
저항의 서곡 울린 이승만 독재
국민들이 진흙탕에 코를 박건 말건 이승만 독재의 사슬은 전쟁으로 탄탄해졌다. 그러나 역사는 사슬이 옥죄일수록 저항의 장엄한 서곡을 크게 울린다.
1952년 '한국전쟁 2주년 기념식 및 북진결의대회'가 부산 충무로 광장에서 열렸다. 오전 10시50분쯤 기념사를 더듬거리던 대통령을 단하 뒤 3m에서 권총으로 겨냥한 사건이 일어났다. 불발이어서 다시 당겼으나 역시 불발이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유시태(柳時泰, 1890~1965년)는 제2대 국회의원 김시현(金始顯, 1883~1966년)의 양복에 신분증을 챙겨 식장에 들어갔다. 둘은 안동 풍산 고향의 의열단 출신이었다. 세칭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백남훈·서상일·노기용·최양옥 등이 체포되었는데 모두 독립유공자였다.
유시태옹은 4월혁명으로 석방되면서 "그때 내 권총 탄알이 나가기만 하였으면 이번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한"이라고 목이 메었다(김삼웅 <독부 이승만 평전>, 책보세, 2012년).
이 무렵 서민호(徐珉濠, 1903∼1974년) 의원 활약상은 야당사의 사표가 됨직하다. 그는 국민방위군 사건을 폭로하러 국회에 나갈 때 무슨 위험이 있을 것을 각오하고 사전에 가족들에게도 밝히고 유서까지 써 놓았다 . 온갖 폭로와 반이승만 활동에 중진 정치인들이 피신을 여러 번 종용했다.
부산에서 배로 여수, 거기서 자동차로 순천까지 계속 미행하던 군 장교가 순천 평화별관 식당에서 밤 9시쯤 "서민호 나오너라!"고 난동을 부리며 권총 두 발을 발사하자 서 의원이 호신용 권총으로 방어한 것이 대위 서창선(徐昌善) 살해사건(1952년 4월)이다.
정당방위를 확대·조작하려고 노덕술·최난수 등이 관여하여 증인들을 위협·고문, 기소했다. 옥중에서 손녀손자 이름을 이승만을 징치하라는 뜻인 치리(治李), 치승(治承), 치만(治晩)이라고 지을 정도로 비분강개한 정치인이었다(서민호, <나의 옥중기>, 동지사, 1962년).
'문둥이 시인' 간첩조작 사건
▲ 일부 우익 언론들은 한 시인의 <한하운시초> 초판(1949)에 실린 시와 이병철 시인의 해제에서 한구 구절씩을 따다가 "공산주의 프로파간디스트"로 조작 공격했다. (오영식 서지학자 제공) |
여기에다 신작 7편을 추가해 1953년 6월 재판(정음사)을 내면서 이병철의 해제를 뺀 대신 시인 조영암·박거영과 정음사 사장 최영해의 글로 채웠다. 월북화가 정현웅(1911~1976년)의 표지 디자인은 색채를 바꾸고 이름은 삭제했다. 문제의 시 '데모'는 제목을 '행렬'로 바꾼 데다 "물구비 제일 앞서 핏빛 깃발이 간다/ 뒤에 뒤를 줄대어/ 목쉰 조선사람들이 간다"와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는 구절을 뺐다.
▲ 한하운 시인이 1949년 출간한 시집 <한하운 시초> |
그런 판에 <서울신문>은 10월17일 '하운 서울에 오다-레프라 왕자 환자 수용을 지휘'란 기사를 시 '보리피리'와 함께 실었다. "4만5000명의 나병환자를 지도하는 문둥이 왕자가 서울에 나타나서 서울 거리를 방황하는 나병환자들을 시 위생과 협조 아래 수용하기 시작했다"며 사진까지 게재해 실존인임을 명백히 밝혔다.
그럼에도 조작을 일삼는 사람들은 진실을 보지 않는다. <태양신문>은 되레 한하운과 주변 인물에게 좌익 연관 비밀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정선(李貞善, 평화신문 문화부장)은 '민족적인 미움을 주자-적기가(赤旗歌) <한하운 시초>와 그 배후자'(11월5~8일)에서 "간밤에 얼어서/ 손가락이 한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위에 떨어진다"('손가락 한마디')란 구절이 "당국에 대하여 문둥이와 빨갱이를 판별 못하도록 하자는 농간"이라고 강변했다.
그는 시 '데모'와 '명동거리1' 등과 이병철의 추천사 중 한두 구절씩 따내어 "공산주의 프로파간디스트"로 둔갑시켰다. 최영해 사장은 <서울신문> 취체역(이사)이며, 한하운을 칭찬한 장만영은 <서울신문> 출판국장으로, <서울신문>이 좌경이라고 우겨댔다. 조작은 힘이 세고 감염력이 높아서 특종을 했던 명기자 오소백과 문제안은 퇴사 당했다.
반공시가 되어버린 '비판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정선·최흥조·김영일(<친일인명사전> 등재, 주간지 소년태양 근무)이 모여 "<한하운 시초>의 발간은 문화빨치산의 남침"이며, 조영암의 '후기'는 민족적인 것으로 캄푸라쥬(위장·은폐)하여 전국 서점에 배본하고 있음은 틀림없는 신각도의 북한괴뢰들의 대남공작 이라는 견해에 일치한 게 계기였다.
이미 11월 초부터 내사하던 관계당국은 같은 달 20일 본격 수사를 공언했고 무책임한 언론들은 박자를 맞췄다. 빽도 돈도 없던 문둥이 시인은 졸지에 검경에 불려 다니며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무슨 뚱딴지인지 본격수사에 착수한다던 바로 이튿날 이성주 내무부 치안국장은 한하운이 좌익이 아니라고 언명했고, 사흘 뒤(24일) 치안국은 무혐의임을 밝혔다. 모든 신문들이 기사화했으나 서울신문(사장 박종화)은 침묵했다.
한하운은 문제된 구절이 원작엔 없었는데 편자(이병철)가 고친 것이라 발뺌했다고 둘러댔다. 그는 <한하운 시전집>(인간사, 1956년 6월)에서 '데모'의 문제 구절을 삭제하고,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를 "지나가고"로 고쳤다. 이어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를 첨부하고는 끝에다 "주(註) ○○○(1946. 3. 13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라는 사족을 달았다.
그걸로도 불안했던지 자작시 해설 <황토길>(신흥출판사, 1960년 8월)에서 '데모'의 배경을 함흥시절로 밝혔다. 이후 시집에서는 '주'항목을 부제로 승격시켜 앞머리로 올렸다. 매카시즘에 의하여 미군정 비판시가 반공시로 변모해버린 시 '데모'는 원상복구되어야 한다.
<꼬리기사>
개작 '데모'선 '핏빛 깃발' 빠지고 배경도 함흥시절로 밝혀
원작 <데모>
'뛰어 들고 싶어라/ 뛰어 들고 싶어라. //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소리와 함께/ 만세 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 물구비 제일 앞서 핏빛 깃발이 간다/ 뒤에 뒤를 줄대어/ 목 쉰 조선사람들이 간다. //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는/ 아우성 소리 바다소리. // 아 바다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개작 <데모-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
'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 소리와 함께/ 만세 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 아우성 소리 바다 소리. // 아 바다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 (*이 기사는 <경향신문>에 먼저 올려졌습니다.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