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년 병신왕 이야기
뉴스로=강명구 칼럼니스트
옛날 옛날 동방의 어떤 나라에 나랏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외모에만 관심이 있는 여왕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왕은 60이 훨씬 넘었어도 곱고 아름다웠습니다. 백성들이 그 비결이 궁금해서 물으면 마음을 곱게 쓰면 그렇게 된다고 말할 뿐 더 이상은 말하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오래된 시녀장이 있었는데 시녀장은 마녀(魔女)였습니다. 마녀는 여왕을 위해 핸드백을 구해주고 옷을 지어다 바치고 얼굴미용을 위해서는 백옥주사, 태반주사, 마늘주사 등 온갖 세상에서 가장 좋고 신기한 주사제를 찾아다 바치고 최고의 미용사를 구해왔습니다. 여왕은 제 모습에 빠져서 늘 거울 앞에서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쁘니?”하고 물으면 십상시들은 거울 뒤에서 “여왕님이 가장 아름다우십니다.”하고 대답하곤 했지요. 십상시도 마녀가 데려온 사람이었습니다. 마녀는 이렇게 여왕의 마음을 홀리고는 여왕의 권력을 대신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왕은 침실에서 잘 나오질 않았습니다. 거울만이 그녀의 친구였습니다. 거울을 보며 혼자 밥도 먹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마녀 시녀장은 권력을 이용해서 자기 말에 순종하는 자들에게 나라 일을 맡기고 권력을 이용해서 나라의 최고 상인들에게 특혜를 주고 엄청난 재물을 축적했습니다. 나라의 살림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백성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왕과 시녀장의 비밀은 시녀장이 키우던 강아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강아지가 짖어대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궁전 밖으로 날아갔고 사람들은 그 소리에 담긴 비밀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분노한 백성들은 촛불을 들고 궁전 밖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2천 명이 모이던 것이 2만 명이 모였고 20만 명, 2백만 명이 되자 여왕은 궁전에 유폐(幽閉)되었습니다. 그 나라에는 왕은 내란이나 외환의 죄 이외에는 불소추의 특권이 있기 때문에 여왕을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여왕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여왕이 죄를 지은 것이 밝혀지면 여왕을 쫒아낼 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여왕은 거짓을 반복하며 자신의 죄를 부인했습니다. 여왕의 죄를 묻기 위해서 사헌부에서 조사를 했으나 사헌부는 여왕의 사람들로 가득하여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질 않았습니다. 마침내 의정원에서 여왕을 도운 죄인들을 심문하기로 했습니다.
증언대에는 수많은 양철 장난감과 목각 인형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올라왔지만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소리만 들으면 구분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것이 양철 검사와 목각 여자 병정이었습니다. 여왕의 죄상을 밝히는 특별한 대사가 나오기를 바라던 백성들은 무대에서 표정 없이 연기하는 앵무새 같은 이들을 보며 다시 분노했습니다.
온갖 못된 지략을 꾸며서 마녀 시녀장을 도운 양철 검사는 컴퓨터처럼 비상한 지적 능력을 소유했지만 어디까지나 양철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지혜(智慧)를 갖지 못했습니다. 양철 인형을 만드는 장인도 교활한 사람이어서 양철검사의 시력을 나쁘게 만들었습니다. 시력을 좋게 만들면 양철 검사는 군대에 가서 3년이나 썩어야 되었지요. 그 대신 양철 검사는 눈에서 레이저 광선을 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레이저로 사물을 인식하고 그것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곤 했습니다. 그가 여왕을 위하여 궁전에서 일할 때 레이저의 위용은 대단했지만 궁전 밖으로 쫓겨난 후로는 사람들의 웃음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혜를 겸비하지 못한 지식만을 자랑하는 양철 검사는 전임 임금님을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정말 무서운 피조물이었지요.
목각 여자 병정은 남의 손길이 닿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여왕님의 몸에 주사를 놓는 간호장교였습니다. 그녀의 혈관을 찾는 손길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습니다. 아무리 나무를 깎아 만든 인형이지만 그렇게 무표정하게 만들 수가 있을 까요? 숱이 많은 빛나는 검은 머리를 7대 3 가르마를 타서 뒤에서 쪽머리를 튼 간호장교의 제복은 제법 잘 어울렸습니다. 커다란 눈망울은 누가 보아도 촉망받는 엘리트 장교의 모습이었지만 목각을 깎는 장인이 목각을 깎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말을 몇 마디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 분명했습니다. 할 줄 아는 말이 몇 마디 되질 않았던 것이 또한 백성들의 분통을 터트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칫 허접한 인형극으로 끝날 이 자리에 백성들에게 시원한 사이다 맛을 보여준 콜롬보 인형의 활약도 있었습니다. 그는 여왕의 부정을 파헤치기 위해 수년간 위험을 무릅쓰고 추적을 계속해 왔습니다. “숨는 자, 감추는 자가 범인이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지요. 그는 어눌한 말씨에 행동도 굼떠 보이지만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싸움개의 집요함을 갖추었습니다. 그가 날카로운 질문으로 양철 검사와 목각 여자 병정을 몰아세우며 궁지로 몰아세울 때 관람석에 있던 백성들은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의 꽉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었던 또 다른 인형도 있었습니다. 시녀장의 호위무사였던 인형이었습니다. 천하제일 검이었던 그는 여왕의 호위무사가 아니라 마녀 시녀장의 호위무사였습니다. 그만큼 시녀장의 위세는 여왕보다도 더 대단했던 겁니다. 잘생긴 호위무사 인형은 여왕과 시녀장의 죄상이 그대로 담긴 문서 사진과 대화를 녹음해서 세상에 알렸습니다. 진실을 알고 싶었던 백성들은 환호했습니다. 여왕과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를 지닌 마녀 시녀장 그리고 엄청난 재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거대한 상인들과 맞서 당당하게 더 나은 세상을 바라며 진실을 말하는 호위무사 인형에게 백성들은 열렬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호가호위(狐假虎威) 란 여우 주제에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설치는 자를 가리킵니다. 머슴이나 애완용 동물처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버리고 권력을 쥔 자의 눈앞에서 알랑거리다가 권력이나 재물의 떡고물을 받아먹으려고 망나니짓을 하는 자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양철 검사는 권력을 손에 쥔 마녀 시녀장의 비위를 맞추며 단맛을 빨아먹으며 양지만 찾아다녔던 자입니다. 마침내 양철 검사는 촛불을 든 백성들에 의해 뜨거운 난로에 던져져서 녹아 조그만 쇳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목각 여자 병정은 호가호위도 하지 못했습니다. 죄라면 그저 못된 윗사람의 명령을 따라 움직였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진실을 말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촛불을 든 백성들은 그녀를 난로에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선량하고 현명한 백성들은 촛불을 그녀에 가슴에 대서 따뜻한 가슴을 선사했습니다. 목각 여자 병사는 각진 얼굴에 미소가 번지면서 이제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왕은 촛불을 든 백성들에 의해 유배지로 떠났고 그 나라에는 평화와 번영이 찾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강명구의 마라톤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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