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비행기 조종사에 뇌물주려한 프란체스카?
이승만-이기붕은 ‘병신공화국 콤비’
뉴스로=노창현특파원 newsroh@gmail.com
“이승만은 하와이에 자진 출국한게 아니라 미국 CIA에 비행기에 태워져 납치된 것입니다.”
김태환 하버드남가주한인동창회장은 언론인 출신의 한국현대사 연구가이다. 그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고 하와이에 간 것이 미국 CIA의 작전에 따른 것이라고 처음 주장한 주인공이다. 묻혀진 각종 사료들을 통해 이승만의 몰락 과정을 파헤친 끝에 이승만의 하야는 결코 “자진 사퇴”가 아니었고 하와이행 또한 “자진 망명”이 아니었음을 입증했다.
그의 출국이 “망명”이 아닌 것은 전 월간조선 기자 이동욱씨의 열의에 찬 노력의 덕분으로 이미 한국내에서 관심 있는 이들에게 알려졌다.(주1) 이동욱씨는 “망명”은 자동사로 자의에 의하여 대한민국을 떠나야 되는데, 그토록 귀국을 열망했던 이 박사가 귀국하지 못한 점에 주목하여 이 박사의 “망명” 시에 성금을 모아 전세기를 보냈다는 당시 허 정 과도정부 발표의 진위를 추적했다. 당시 하와이 동포들은 모두 작고해서, 당시 하와이주재 총영사 오중정 씨에게 문의한 결과 성금을 모은 사실이 없었고 전세기도 보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밝혀냈으며, 출국은 자의가 아니므로 추방/유배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정 과도정부가 이박사를 추방한 적도 없고 전세 비행기에 태워 유배시킨 사실이 없다는 점에서 정확한 단어 선택은 아니다.
김태환 회장은 “이동욱씨가 그만큼 밝혀낸 것만해도 큰 공로라고 치하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며서 “다만 이 기자의 탐구가 그 선 이상으로 더 나가지 못한 것은 그분이 한국에 있는 자료만 접하고, 접촉한 인사들이 모두 한국계 인사에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60년 5월 29일 이 박사 “망명” 단독 보도로 성가를 높힌 경향신문 기사와 당시 임시 정부 허정 수반의 회고록을 대조해서 이 박사의 1960년 5월 29일의 출국 사실을 다음과 같이 단정한다.
1960년 4월 27일 대통령직을 사퇴하고 이화장에서 칩거(蟄居)하고 있던 이 승만 박사는 아직 국회에 자유당 출신 의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행정부 역시 자신의 잔재 세력이 남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부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듯 인사차 방문하는 점을 이용하여 권토중래(捲土重來) 할 길을 모색한다고 파악하고 있든 미 대사관 측(주2)은 이 박사의 하야만으로 마음을 놓을 수 없어서 그를 한국에서 축출할 계획을 세워서 그의 주변 인사를 통해 잠간 동안 건강상 전지 요양이 필요하다고 이 박사에게 권고하게 하며 동시에 하와이에 있는 그의 추종 인사들에게 이 박사 초청을 위해 초청장등을 만들어 보내게하고 성금을 모아 전세기로 모셔오는 듯한 공작을 착수하였다.(주1)
김태환 회장은 “허정 과도정부나 이 박사 본인은 물론, 측근까지도 미국의 공작이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허 수반이 처음으로 이 박사의 하와이 행을 알게 된 시점은 이 박사가 출국하기 바로 3일 전인 5월 26일이었다. 허 정 수반과 한국 정부 차원에서 한 일은 이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여권을 만들어 준 것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한 미 대사가 오직 출국 3일 전에 허 수반에게 이 박사 부처 출국을 알린 것은 한미 양국의 협의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한국정부에 기정 사실을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덧붙였다.
그는 “허 수반이 자신의 회고록(주3)에 매카나기 미국 대사로부터 통보 받은 날이 실제보다 약 열흘 앞선 5월 16일로 기술하였으나, 미 대사관 기록과 다른 것은 시간이 한참 흐른 다음에 기억을 더듬어서 적었기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김태환 회장은 “이 박사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출국은 미국 대사관/CIA의 잘 짜여진 각본에 따라 하와이로 휴가차 전지 요양하는 모양새를 갖추어 CIA의 간판회사인 CAT 전세기에 태워 하와이로 압송해갔다. 법적으로 보면, 위계에 의한 납치행위다”라고 강조했다.(주4)
재미있는 점은 한국 정부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복수 여권을 만들어서, 필요한 경우에 그녀의 고국인 오스트리아로도 갈 수 있게 배려했다는 점이다.
“정신이 흐린 이 박사는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생각 못했던 반면, 비행 도중 프란체스카 여사는 귀중품을 비행사 등에 선물(뇌물)로 주었으나 그들이 받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녀와 이 박사의 운명이 그들의 손 (비행사 등)에 달렸다고 생각해서 뇌물을 바치려 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그들은 미국 정부의 명을 받아 이 박사 부처를 납치해서 가는 정부 공무원인 셈인데 피납자로 부터 뇌물을 받을 수가 없고, 만일 받았다면, 미국법에 의해 범법자가 된다.”
그는 “미국은 민주주의와 정의를 내새우지만, 자신의 영향권 안에 있는 나라의 전/현직 국가 원수들의 행적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에 체포/납치/ 압송 또는 살해도 주저하지 않는다. 피살의 경우는 베트남의 고 딘 디엠, 칠레의 아옌데 등이 있고, 체포는 파나마의 마누엘 노리에가 를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다”고 소개햇다.
김태환 회장은 “조선 말엽에 임오군란을 진압하려 온 청나라 군대가 나라(조선)의 정세를 어지럽혔다는 명목으로 고종의 부친인 흥선 대원군 이하응을 청국의 천진으로 압송(押送)해간 전례(1882년) 가 있다. 우리나라에 앞으로 두번 다시 이러한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김태환 회장은 이 박사가 당시 노망기를 보여 박찬일 비서가 프란체스카와 함께 국정을 농단했다는 사실 또한 밝혀낸 바 있다. 그는 “사실상 대통령은 유고(有故) 상태였으며, 부정 선거를 통해 후계자로 낙점한 이기붕은 기동도 못 할 뿐 아니라 의사 표현(말)도 할 수 없는 문자 그대로 병자여서 이승만과 이기붕 콤비는 “병신 공화국” 이 될 뻔하였다“고 지적했다.
이것을 잘 안 미국이 손을 써서 박 마리아(이기붕씨 배우자)가 세도하는 것을 막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아이젠하워 미국 행정부가 이 박사를 실각(失脚)시켜서 압송하게 됐을까. 김태환 회장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다.
미국정부는 왜 이승만을 압송했나?
이승만 박사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 각을 진 최초이자 가장 큰 사건은 한국민들이 아직도 영웅적 쾌거로 믿는 “반공 포로 석방”이다. 아이크가 선거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한국전 (6.25 사변) 휴전 달성을 목전에 두고 27,000 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한 것은 이 박사가 휴전 협정 교섭을 중단시켜서 전쟁을 연장시키려 한다고 판단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을 격노하게 만들어 그는 국가안전보장위원회 회의에서 (이미 작성된 이박사 제거 작전인) 에버레디 작전(Plan Everready)을 발동하여 이 승만 대통령을 퇴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주 5) 주변에서 만류해서 당시엔 그냥 넘어갔다. 특히 아이크가 이 박사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반공 포로 석방 사건으로 휴전 조인이 약 5주가 연기되는 바람에 불필요한 미국인 자제들의 인명 피해(Casualties) 가 주당 약 1천 명으로 근 5천명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민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반공포로 석방은 근본적으로 불필요했다. 그 이유는 이미 그해 6월 8일(석방 10일 전)에 유엔측과 공산측에서 휴전 교섭상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포로 송환 문제를 “자유 송환 방식” 에 합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반공 포로 석방에 격분한 중공군은 당시 유엔군 사령관이 평한 것 같이 (주 6), 북진 통일이 이 박사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는 점을 본때있게 보여주려고, 7월 13일부터 약 일주간 한국군이 담당했던 중부 전선의 금성천 돌출부(Kumsong River Salient)에 한국전 참전이후 최대 규모의 공격을 가해서 우리 장병 약 3만 명이 죽거나 다친 (공산측은 6만 3천으로 발표) 한국전 발발이후 단일 전투(금성천 전투 또는 7.13 공세로 불리운다)로는 최대의 인명 피해(Casualties)를 당해서 (주7), 이 박사의 노망기로 그 자신 조금만 젊었더라면 고 딘 디엠 신세가 될 뻔 했고 종내엔 권좌에서 축출(逐出) 될 빌미를 만들었을뿐만 아니라, 우리의 젊은 장병 3만 여명을 도살장으로 몰아넣었는데 아직도 이승만 추종자들은 “영웅적 쾌거” 라고 읊어대고 있다.
다음으로, 이 박사가 정적인 조 봉암 선생을 간첩으로 조작하여 사형 판결을 받게했는데, 미국은 당시 주한 미대사 다울링씨를 통해 그의 구명 운동을 하였고, 그에 앞서 1958년 12월 24일 밤에 야당 의원들을 감금하고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보안법 개악한 것(소위 24 파동)에 강력한 비판을 했고, 이 박사에 가까운 월터 져드 하원의원도 항의 서한을 보낸 바 있다. 다우링 대사는 당시 제2인자였던 이 기붕 국회의장을 몇차례 만나서 조 선생의 처형만은 면하게 해달라는 미국 정부의 뜻을 전했고, 이 의장은 미온적으로나마 힘을 쓰겠다고 했으나 그의 처형을 막지는 못했다.
일부에서는 미국측이 조 선생의 처형을 뒤에서 조종한 듯이 비난하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정반대였다. 실제로, 강 원룡 목사의 글을 보면, 조봉암 선생과 그의 최측근인 윤길중씨는 미국이 다음 선거에서 조 선생을 이 박사의 대타로 지원한다고 확고히 믿었다고 한다. 그들에 따르면, 미국측 인사가 조 선생에게 매일 방문하여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그들이 얘기는 안했으나 재정 지원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들이 바보가 아닌데 영어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 그토록 미국의 지원을 확고히 믿었을 수는 없다고 본다. 이 박사가 미국측이 조봉암 선생을 측면으로 지원하는 점을 눈치채고 제거에 선수를 친 것으로 보인다.
1971년 대선 때, 박정희정권은 김대중씨에게 갈 수 있는 모든 자금원을 다 봉쇄했으나, 그래도 김대중측은 선거 운동을 효과적으로 진행했는데, 그 자금은 미 대사관측에서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미국은 잉여 농산물(PL 480) 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데 판매 대금을 원화로 받는다. 아마 그 돈의 일부를 김대중측 선거 자금으로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자고로 야당에도 자금 지원을 하여 집권당에 압력을 가하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근래에 조봉암 선생 사건을 대법원에서 재심을 통해 무죄로 확정하여 복권하였는데, 미국측의 조 선생 구명 운동 사실이 비밀 해제된 문서에서 나온 것이 재심 판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박사의 원죄는 그의 돈키호테 같은 “북진 통일” 잠꼬대였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어렵게 달성시켰는데, 이 박사는 시도 때도 없이 단독 북진을 읊어대어서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항상 불안한 눈초리로 이 박사를 경계했다. 그는 휴전 협정이 조인된지 6년이 지난 1959년 6월 25일에 열린 NSC 회의(주 8) 에서도 이 박사가 단독 행동(북진) 을 취할 기미만 보여도, 그를 제거하고 그토록 “Holy Cow” 처럼 모시는 한미동맹을 폐기하고, 미군을 철수시킨다고 말하며, 한국에서 유엔군 사령관을 역임한 램니처 대장에게 한국군의 단독 작전 움직임을 얼마나 일찍 감지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렘니처 대장은 미군이 유류와 포탄을 한국군에 공급하는데, 평균 일주간 사용량 이상 요구하는 경우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고 답해서 아이크는 안도할 수 있었다. (한미동맹 너무 맹신하지 마시라. 미국은 언제나 자신의 국가 이익에 따라사전 통보 없이 동맹 폐기를 할 수 있다는 위에 든 예를 잘 기억해야 한다)
한국 주재 CIA 지부는 이 박사가 그해(1959년) 5월 하순부터 눈에 띄게 정신 상태가 혼미해졌고, 일상적인 정사를 보지 못하며 박찬일 비서가 프란체스카 여사와 협의해서 국사를 주무른다는 보고를 올렸다. 주한 대사에게서 역시 같은 보고가 올라오자 정신 나간 사람에게 대한민국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 대통령과 친분이 있는 월트 져드 하원의원을 그해 10월 하순에 비밀 특사로 보내 연만하시니 후계자를 세우고 2선으로 물러나는 것이 좋겠다는 우정어린 충고를 하였으나, 씩 웃고 넘겼다한다. (주4 참조).
이 사실은 비밀 특사였기에 정식 외교 문서에는 나오지 않고 앞서 기술한 부대사 마샬 그린씨의 회고 회견기에 나온다. 필자는 져드 의원을 경무대로 안내한 와츠 서기관의 회고 회견기(주 8)에서 발굴했으며, 최근에 져드 의원이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자신이 직접 타이프로 쳐서 아이크에게 직보한 보고서를 한국인 최초로 발굴했다. 져드 의원 비밀 특사 파견은 “이 박사의 자진 하야”라는 신화를 완전히 파멸시키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3.15 부정 선거와 4.19가 일어나자, 마샬 그린이 뒷그림을 그린대로 매카나기 대사가 발 빠르게 움직여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눈엣가시 같았던 독재자 이승만을 드디어 제거한데 이어서 다시는 불씨가 되지 않도록 미국 하와이로 납치해서 압송하는 작전을 아주 부드럽고 매끈하게 처리해서 주변의 누구도 눈치채지 않게 해치웠다.
이 박사 출국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첫째는, 5월 26일 매카나기 대사와 허 정 수반이 처음으로 이박사 출국을 논의하면서 미국측은 이 박사의 출국에 한국민들이 미국이 이 박사가 재판에 회부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비쳐질까봐 염려하였는데, 허 수반은 ‘그점은 염려마시라’며 자신이 뒷 처리를 감당하겠다고 자원했다. (주10) 허 수반은 이 박사 출국 후에 공보실을 통해 건강상 전지 요양을 위해 하와이 교포들이 마련한 전세기로 떠났다는 PR 작전이 성공하여 사실과는 달리 미국의 납치 압송 작전을 거짓말로 호도(胡桃)했으나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진실로 통하고 있다.
둘째로, 이 박사는 우석근 경호원에게 이화장을 떠나기전에 “아이젠하워가 올 때 내가 (한국에) 있으면 국내가 시끄러워져”라고 했는데, 왜 그가 아이크를 회피하려고 했을까? 마샬 그린 씨에 의하면, 이 박사가 끝까지 물러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이미 반년 전에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자신에게 비밀 특사로 월터 져드 하원 의원을 보내서 퇴진을 종용한 사실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비빌 언덕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이 박사 사직 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박사의 용퇴(?) 를 칭송하며 여생을 원로로서 평안히 지내시라는 친서를 전했으나 그 편지 내용을 들은 후 침을 뱉어서 구겨서 땅에 던졌다고 편지를 이화장에 전달한 와츠 서기관이 회고 회견기에 기록했다. (주9)
이승만 전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나서 빛 좋은 개살구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분노를 표한 것이다. 그래서, 이 박사는 어색한 장면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태환 회장
** 저는 이 글을 무거운 마음으로 썼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힘들고 부끄러워도 우리 동시대인들과 후세에 올바른 역사를 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옛날 유태인들은 그들의 조상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했고, 또한 바빌로니아로도 끌려가서 노예 생활을 한 것도 사실대로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학교 다닐 때 임진왜란은 배웠지만 왜놈들의 만행 즉, 우리 선조들의 코를 베어서 전리품으로 가져가 오사까에 코무덤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 박사가 강권으로 물러나고 미국으로 납치되어 압송된 것을 부끄럽다고 “자진하야” 와 “자진 망명”으로 포장해서 숨겨 나갈 수 만은 없습니다. 반공포로 석방으로 3만 여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는데, 아직까지 부역자들은 이 박사의 망령된 노망스런 짓을 “영웅적 쾌거”라고 읊어대는 우스꽝스런 노릇은 그만 두어야 할 것입니다.
아직 한국에 이승만 추앙족이 많은데, 백선엽 장군이 당시 미군과 내통하여 이 박사를 제거하려는데 가담한 정황이 확연한데 왜 그 문제는 그냥 넘어갑니까? (주 11) 그는 지금 연세가 많지만 생전에 자신의 역할을 해명하지 않으면, 일제 때엔 왜인들에 아부(阿附)하고 그 후엔 미군에 충성을 하려한 영원한 부역자로 역사에 그 이름을 오래도록 남길 것입니다.
또한 하마트면 원수로 옹립될 뻔한 그는 “반공 포로“ 석방후에 공산측의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전방 사단장 교체를 단행하여 새로 사단장에 임명된 지휘관들이 사단 파악이 안된 상태에서 중공군의 대공세에 직면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미군측에서 전임 사단장을 도로 불러서 지휘하게해서 그나마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습니다. 몇 개 사단이 절단나는 비극(Tragedy)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 사단에 사단장이 두명 씩 있는 웃을 수도 없는 희극 (Comedy)이 백 장군 덕분에 연출 되었습니다. 물론 전시였기때문으로 탓할 수 있겠지만, 영관급 밖에 자질이 되지 않은 분을 대장으로 앉혀 놓았으니, 그러한 참화(慘禍)를 입었던 것입니다.
결론부를 앞에 기술하였는데, 이를 즐명할 자료를 기술 순서대로 보여드린다.
1. 이동욱: 이승만은 하와이에 망명한 적이 없다 (http://wildkim.tistory.com/496 ) 에서 “망명”은 당시 동아 일보와 경향신문이 추측으로 사용했는데 지금까지 사실인 것 처럼 통용된다는 점을 통탄하고 있다.
2. 마샬 그린은 : http://adst.org/wp-content/uploads/2012/09/Green-Marshall.pdf (P 50) 에서 그는 비올 때 피뢰침 (Lightning Rod) 에벼락이 몰리듯 이 박사 추종자들이 이화장으로 몰려서 그가 권토중래를 획책하여 다시 집권을 꿈꾸는 것으로 불안하게 생각되어 이 박사를 한국에서 발을 붙일 수 없게 할 계획을 추진했다는 점을 암시했다.
3. 허 정 회고록 “내일을 위한 증언” - 미국이나 서구의 정치인들은 사건이 있을 때 당일에 즉시 기록을 하는데, 허 수반의 글은 한참 뒤에 기록해서 미국측 기록과 무려 10일 간 차이가 난다 (허: 5월 16일 vs 미국측: 5월 26일)
4. 마샬 그린 부대사의 수기 Moments in U.S. Diplomatic History
(http://adst.org/2013/04/the-fall-of-south-korean-strongman-syngman-rhee-april-26-1960/ 그린 씨는 당시 부대사격인데, 이 박사를 권좌에서 축출시키고 CIA 비행기로 미국으로 압송한 것이 자신의 기획으로 이루어졌고 매카나기 대사가 직책상 전면에 나섰다고 그의 축소판 회고 회견기에 자랑하였고, 그는 이 박사 제거와 압송에 보여준 활약상 덕분에 미 국무부 안에서 쿠데타 고수(CoupMaster)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바람을 일으켰는데, 인도네시아 대사로 재직시 스카르노를 실각시켜서 실제로 CIA 소속이 아닌지 의심케하는 대목이다.
5. 반공포로 석방 충격 아이젠하워… 이승만 제거 쿠데타 준비했다 - 중앙일보 (http://news.joins.com/article/4988933)
6. 휴전 당시 UN군 사령관 Clark 대장의 ‘7.13 공세’에 대한 촌평 전문:
There is no doubt in my mind that one of the principal reasons- if not the one reason- for the Communist offensive was to give the ROK's a 'bloody nose,' to show them and the world that 'PUK CHIN'- Go North- was easier said than done (from General Mark W. Clark, "The Truth About Korea," Collier's, vol. 133, No. 5 (March 5, 1954) , p. 48.)
7. 미국군 한국전쟁 사 가운데 1953년 전사상자 통계표에서 (http://www.history.army.mil/books/korea/truce/ch21.htm
8.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8-60v18/d277 411th Meeting of NSC, June 25, 1959. 23 pp plus 15 pp attachments [Latin American developments & Cuba; Communist China; India; Korea; basic national security policy]
President Eisenhower: ---including deposing Rhee, --- military alliance between the U.S. and the Republic of Korea would be broken at the moment.
9. William Watts 는 이승만 정부 말기에 주한 미국 대사관 서기관으로 재직했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비밀 특사 월터 져드 하원의원을 경무대로 이 대통령에게 안내했으며( P 18 ) 또한 4.19 이후 이 박사가 이화장에 있을 때 아이크의 친서를 전달했다. 이박사가 편지를 읽어주는 것을 들은 다음에 편지에 침을 뱉어서 땅 바닥에 던진 것을 목격했다고 (P 21 ) 그의 회고 회견기에 기록했다.
The Association for Diplomatic Studies and Training Foreign Affairs Oral History Project WILLIAM
WATTS (http://www.adst.org/OH%20TOCs/Watts,%20William.toc.pdf
10.문서번호319(Editorial Note) https://history.state.gov/historicaldocuments/frus1958-60v18/d319
이 박사 출국 직전의 상황 전개를 미국측 입장에서 정리한 기록으로 허 수반이 이 박사 출국을 위해 군용기를 부탁하자 매카나기 대사는 미국/미군이 항공편을 제공할 수 없다면서 전세기가 마련됐다고 염려할 것 없다고 답변했다. 소위 "전세기"는 겉으로는 민간 항공사 CAT 소속으로 위장 되었으나, 실제적으로 CIA 소속 작전용 항공기로 대외적으로 미국 정부 비행기가 아닌 것처럼 꾸몄으나, 마샬 그린은 이 박사 부처가 CIA 비행기로 한국을 떠났다고 그의 회견기에 실토했다. 미국 대사가 허정 한국 정부 수반에게 눈감고 아웅씩 속임 수를 썼다. 사정을 잘 모른 허 수반은 들은대로 옮겼을 따름이다.
박 명림 연세대 교수 특별기고 ([6·25 전쟁, 1128일의 기억] (254) 박명림 연세대 교수 특별기고 - 중앙일보(news.joins.com/article/4944512)
박 교수에 따르면 ---다른 하나는 이승만 대안 모색의 실현 가능성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았건 몰랐건 백선엽은 미국이 고려하던 대안의 한 명이었으며, 동시에 미 군부가 전쟁지휘와 종결문제를 가장 긴밀히 논의해 오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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