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생, 만 29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도 아닌 패션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자신의 브랜드인 '몽한복(MON HANBOK)'으로 개인 런칭하여 활동하고 있는 이지예 디자이너를 만났다.
● 파리에 오게 된 동기는?
한국에서 패션 섬유디자인을 공부하고, 회사에 입사를 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실기보다 이론 위주의 공부를 하고 일을 하려니 실제적인 업무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한마디로 자괴감이 컸죠. 자괴감은 상실감으로 이어졌구요. 대학 입시에 보낸 시간들, 대학에서 보낸 시간들이 너무 허무해져, 파리에서 제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어 파리에 왔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23살이었네요.
●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는 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도 하면서 쉬운 일이기도 한데요?
저는 7살 때 파리에서 패션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이미 했어요. 패션 디자이너를 하겠다는 특별한 계기는 기억에 없지만, 어린 시절에 품은 꿈이 운명처럼 저를 파리로 오게 한 것 같아요. 파리에 올 수 밖에 없는 꿈, 소망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시크릿’처럼 그렇게 꿈의 상자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고등학교 때는 제 7살 때의 꿈은 잊고 미대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싶어 그림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옵션수업으로 듣던 패션 일러스트 공부가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옷을 그릴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집중하게 되고 즐거웠어요. 그때 비로소 제가 좋아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이 패션 디자이너란 것을 알았어요. 잊고 있던 꿈이 저를 찾아와 인도해준 거죠.
● 파리에서의 유학 생활은?
디자이너가 내 길이란 확신이 서서 고등학교 선생님과 진학 상담을 할 때 파리로 유학을 가고 싶다고 했어요. 영국에서 유학경험이 있던 선생님이 바로 가서 실패하면 힘들다고 한국의 대학에 입학해 1학기라도 수업을 받고 가라고 하셔서, 대학에 들어가 공부하고 실습도 하고 취직도 했는데 한계를 느껴 왔죠. 그런만큼 프랑스에 와서는 랭스에서 어학연수를 1년 열심히 하고, 스틸리즘 전문학교(studio bersot)에 2학년으로 편입해 공부를 하고, 수습 1년을 하고 졸업을 했어요.
학교 다닐 동안에도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과정을 거치고 왔기에 더 열심히 했죠.
졸업을 위해서는 1년 수습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정말 구하기 어려웠어요. 많은 한국유학생들이 큰 회사에서 일을 찾지만 쉽지 않고, 찾아도 일이 어려워 포기하고 돌아가요. 전 파리에서 일을 계속하고 싶어서 계속 두드렸죠.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유럽에 내가 만든 한복을 응용한 일상복으로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굳히기도 했고요.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열심히 찾고 찾으니 수습할 기회가 왔어요.
기성복을 만드는 작은 규모의 회사(Black Mojito Paris)에서 6개월 일할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에요. 회사의 근무조건이나 보수 등을 고려할 수 없을 만큼 힘들게 구한 것이라, 35시간 근무로 수습사원 최저임금인 한 달에 445유로를 받으면서 일했어요.
● 수습이 끝난 후에, 프랑스 회사에서 일을 했나요?
6개월 수습이 끝나고, 이 회사에서 정규직(CDI)으로 계약을 하게 되었어요. 주 39시간으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근무하며, 1600유로의 월급을 받으며 프랑스에서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거죠.
이곳은 디자인 회의를 통해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작품을 골라, 상품은 중국에서 생산하고, 판매는 프랑스에서 하는 시스템이었어요.
일을 하면서 힘들었던 것은 실무보다 실무로 사용되는 기술 용어들이었지만, 이런 것은 일하면서 배워 나갈 수 있었고, 무엇보다 상사와의 관계가 어려웠어요.
중국계 프랑스인 사장에, 디자이너로는 프랑스인 1명, 한국인 1명, 아프리카인 1명, 호주인 1명이 일을 했는데 디렉터의 변덕스러운 성격에 다들 지쳐서 나중엔 디자이너들이 집단 사퇴를 선언했죠.
사태 마무리는 디렉터의 퇴임으로 끝나는 듯 했는데, 그 자리를 사장의 부인이 대신하면서, 모든 일에 간섭하고 참견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게 되어 프랑스 출신 디자이너만 남고, 모두 퇴사했죠.
저도 이때 퇴사를 해야했는데, 그만둘 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런저런 일들에 치이면서 지치기도 했고, 일하는 것에 비해 보수도 작았어요. 무엇보다 제가 가장 큰 고민을 한 것은 잘 팔리는 상품을 카피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창의적인 디자이너로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다른 부수적인 어려움까지 더 크게 할 만큼 흥미가 없어지고, 의욕이 사라지게 된 거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을 시작하자 결심을 한거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안정이 된 40~50대에 하려던 개인 런칭을 하는 것으로요. 실패해도 될 나이다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더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 개인 런칭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사업등록증을 받는 데 일 년이 넘게 걸렸어요. 2015년 4월에 서류를 준비하면서 6월에 옷을 만들기 시작했죠. 사업자 등록증이 나오면 바로 판매를 위한 준비도 해야 하는데 프랑스 아시죠? 느리고, 까다롭고, 뭐든 쉽지 않은 거요! 서류, 서류, 기다림의 연속 속에서 디자인을 해서 한국에 갔어요. 개인 런칭이라 적은 숫자의 옷을 만들어야하고, 대량구입을 선호하는 단추부터 모든 부수적인 것들을 구입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지방까지 돌며 공장을 찾아다녀야만 했어요.
그래도 한국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일을 포기 할 수 없었어요. 아시아나, 동유럽에서 제품이 생산되는 것보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더 신뢰받고, ‘몽한복’은 한국에서 생산될 때 의미가 있거든요. 한복이 가미된 옷이라 한국에서만 만들 수 있기도 하고요.
● 한복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의 옷인 한복을 유럽에 일상복처럼 만들어 즐겨 입는 옷으로 만들면서, 서양 옷만 쫓는 것을 탈피하고 싶었어요. 서양옷이 한국에서 일상복이 된 것처럼, 거꾸로 유럽에 우리 옷을 만들어 외국인들이 입어도 되잖아요!
한복이 가진 아름다움을 살려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트랜디하고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일상복으로, 옷의 품위를 살리면서도, 서양옷과 매치해 입을 때도 잘 어울리는 옷을 만드는 것이 제가 하는 일이예요.
프랑스인들은 자기만의 개성적인 옷을 선호하는데, 독특한 한복의 미가 살아있어 연령대와 상관없이 관심을 가지고 구매해요. 한류의 영향도 있어 10대들도 관심을 보이고 반응이 좋아요.
자주 살 수는 없지만 오래 입는 옷, 한번쯤 사고 싶은 옷을 만들고 싶어, 고품질을 추구하기에 가격이 조금 높아 걱정했지만 이로 인한 어려움은 없어요.
● 몽한복은 어디서 구입할 수 있나요?
아직 매장이 없어 인터넷으로 주문이 가능해요. 팝업 스토어나 옷을 판매할 행사가 있는 곳을 찾아 홍보와 판매를 하고 하는데 반응이 좋아 불안함을 녹여줍니다.
지금은 젊은 창작자들이 여름맞이 팝업스토어를 열고 있는 La fabrique de l'été 라에 참가해 판매중이예요. 지난 제 1회 코리안 페스티발에서도 참여해 판매를 했는데 반응이 엄청 좋았어요.
잡지에 홍보를 하기 위해서나 백화점 입주를 위해서는 에이전시가 필요한데 아직 그런 여력이 없어 노력중이예요. 실물을 직접적으로 선보여야 판매 활로가 커지거든요. 곧 제 매장을 가지게 될 것이라 믿어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를 살아오면서 배운 것처럼, 열심히 도전하려고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며 용기를 낸 이지예 디자이너는 그것만으로 이미 성공한 사람일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실패도 성공도 없다는 말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해가는 그 과정이 성공이고, 그녀가 원하는 일에 따르는 어려움을 이겨내며 단단해지고, 커지는 자긍심이 그녀가 원하는 길로 이끌어주는 힘이 될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방향의 이정표가 늘 그녀를 주저앉고 싶을 때 지켜내주 듯, 그녀의 지도는 이렇게 퍼즐처럼 한 조각씩 완성되어가고 있다.
이지예 디자이너의 옷을 만날 수 있는 La fabrique de l'été 팝업 스토어
주소 6, Rue des Archives, 75004 Paris
기간: 7월 3일-7월 9일까지
월요일부터 목요일 11h-20h
목요일 21h
토요일 10-20h
일요일 10-19h
몽한복싸이트: http://monhanbok.com/ko/
.
【프랑스(파리)=한위클리】조미진 기자